[사람의 길]즐거운 인생, 메리고라운드 요리하는 디자이너 김태정

2008. 5. 8.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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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아도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마음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빛나는 것들 말이에요.

밝게 빛나는 게 이 세상에 있다는 게,

그 빛이 동공을 통하지 않고도 느껴진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가끔 생각하곤 해요.

노래, 추억, 사람, 사랑… 눈을 감아도 보이는 그날의 온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봤어요.

그림, 공연, 바람소리… 정다움, 따뜻함, 포근함, 바다, 설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좀 어른스럽고 단정하게, 지혜롭고 재치 있게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어요.

그런 자연스런 스밈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어느 날

메리고라운드가 태어난 거예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

이곳을 우연히 찾아주셨던 분들이라도 우연으로 스치듯 끝내버릴 연이 되게 하진 마요.

꽁꽁 박제해둔 아름다운 시간들을 한 번 두 번씩 들춰보면서

많이 힘들어도 씩씩하게 좋은날을 기다려봤으면 좋겠어요.

하루하루 힘겨운 세상에서 다들 잘 견디고 있는 거죠?

힘들 때 이곳에 와서 웃음을 찾아가세요.

언제나 당신의 자리를 비워둘게요.

즐거운 인생, 메리고라운드-.

생각해보라. 놀이공원의 회전목마는 아무런 시름 없이 신나게 돌아간다. 어린 당신은 목마 위에 올라타거나 아버지의 무등 위에서라도 목마보다 더 깔깔거리며 돌아간다. 생각해보라. 놀이공원의 회전목마는 꿈결처럼 아름답게 흘러간다. 아련히 바라보는 연인의 눈길이 거기 있는가. 생각해보라. 어느덧 시간은 흘러 아이의 웃음소리가 목마를 타고 해맑게 스쳐간다. 그를 지켜보는 당신 어깨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마냥 눈부시다. 그처럼 회전목마는 기억 속에서 언제나 즐겁고 언제나 행복하다. 우리 인생이 늘 그와 같다면, 그것이 인생이라면…. 메리-고-라운드.

홍대 앞에서 와인과 파스타 전문점인 '메리고라운드(Merry go round)'를 운영하고 있는 김태정(32)씨. 아직 싱글이지만 그녀는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지금하고 있는 가게 일에도 정신이 없을 뿐 아니라 겸하고 있는 디자인 일도 바쁘기 때문이다. 남자?! 라는 생각을 가끔 해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일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이 더 아름답고 더욱 사랑스럽다. 특히 일이 잘 되었을 때 만족감은 남자와 연애할 때 기분과는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그녀에게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새롭게 태정씨 같은 여성을 나타내는 'W-Girl'(더블유걸)이라는 단어가 여성을 표방하는 새로운 단어로 화제가 되고 있다. W-Girl은 자신의 직업에 애착을 갖고 열심히 사는 여성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흔히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W-Girl에게 워커홀릭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핑크빛이다. 그녀들에게 일(Work)은 필수적인 요소고 일을 위해서라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그녀들은 스스로 원하고 갈망하는(Want) 일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이러한 그녀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만족하는 아름다운 삶(Wonderful Life)이다.

- 김정은 '일을 사랑하는 당신, 우리는 W-Girl이라 부른다' 중에서

태정씨는 오전 11시면 가게 문을 연다. 어젯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문을 닫은 관계로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가볍다. 문을 닫는 시간은 툭하면 늦어지기 일쑤다.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손님들의 즐거움을 쉬 끊어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래도 요즘은 집에 돌아가 마저 해야 할 일이 없어 한결 홀가분하다. 대학원 논문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프리랜서 디자인 일은 쉬기로 했다. 프리랜서 일이라는 것이 한 번 손을 놓으면 그대로 처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막바지 논문을 마칠 때까지는 그에만 열중할 생각이다. 정신없이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조금 한가해지는 오후 3~5시면 가게에서 논문을 준비한다.

태정씨가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논문의 주제는 '성경의 그래픽적 재해석'으로 성경 상의 키워드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다. 크리스천인 그녀는 '크리스천 디자이너'를 블루오션으로 삼고 있다. 논문을 제출하고 나면 더 나아가 이제까지의 애니메이션 수준에서 벗어난 전혀 새로운 성격의 '성경시각사전'을 한번 만들어볼 작정이다. 그 바탕 위에 본격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사이트를 통해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 손쉽게 사용토록 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디자이너기 때문에. 그 기초가 마무리되는 대로 그를 들고 지금 다니는 교회부터 시작, 큰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해볼 생각이다.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어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못 이룰 일을 마음조차 갖게 하겠는가. 그녀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

태정씨는 3년 전, 다니던 LG화학 디자인연구소를 나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첫 직장, 배운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았다. 직장은 가족적인 분위기에다 바로 위 선배가 무려 10살 터울일 정도여서 생각지도 않은 사랑도 참 많이 받았다.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10년은 채우고 나오리라 다짐했건만 '서른 즈음'의 나이가 되면서 변화에 대한 욕구가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왔다. 어찌 보면 잘 짜인 직장에서 자신은 하나의 부품과도 같았다. 음악적 연상을 패키지에 반영한 디자인 시안이 광고기획사에 의해 채택된 것을 시작으로 '투잡'을 하면서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일에 매달려도 봤지만 자아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변화가 필요하다…. 내 이름을 내건 디자인을 하고 싶다…. 그녀는 8년 동안 다니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었다.

태정씨는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자신의 디자인이 개념도 정의도 없는 주먹구구식이었음을 깨달았다. 밤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틔워나갔다. 김장훈, 비안, 에픽하이 등 주로 앨범 재킷이나 공연 포스터를 디자인하면서 자신만의 컬러를 갖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아티스트'가 아닌 '디자이너'는 무엇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200%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다시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못하는 고단한 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 고단함이야 그동안의 시행착오에 대한 보상심리가 너끈히 물리쳐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더 큰 사고를 쳤다.

태정씨가 홍대 앞에 '메리고라운드'를 낸 것은 2007년 8월이었다. 무슨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카페 같은 작은 공간이 갖고 싶었던 거다. 가끔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공간에서 편히 쉬고도 싶었다. 요리자격증 하나 없으면서 와인과 파스타 가게를 낸 것도 자신이 워낙 '만들고 먹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닐 때 외국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업무와 견학'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곳에서 제일 맛있다는 음식점을 찾아다녔다. 숙소로 돌아오면 그 음식을 흉내내어, 아니 자기 식으로 만들어보는 것을 즐겼다.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요리와 음식에서 위안을 찾던 태정씨였다. 한껏 슬프다가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마냥 행복해지는 그녀였다. 그 포만감을, 그 즐거움과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그녀는 퇴직금과 그동안 번 돈을 모아두었던 것에 '마미'의 힘을 보태 용감무쌍하게 가게를 냈다.

'메리고라운드'는 50㎡ 남짓의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에 담긴 태정씨의 꿈만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작은 공간은 그냥 음식만 파는 공간이 아니라 감성을 파는 복합문화공간이고 '시각커뮤니게이션'을 시행하는 장소다. 태정씨는 부모와 함께 가게를 찾은 아이들이 그림이나 소품에 손대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만져보도록 모른 척 내버려둔다. 이 작은 공간은 그 안에 걸린 작품들에게는 가장 편안한 갤러리가 되어준다. 사람들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은연중에 작품을 받아들인다.

태정씨는 전문 요리사가 아닌 만큼 일정한 음식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 대신 분위기와 감성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음식조차 그녀에겐 일종의 디자인인 셈이다. 그녀는 손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가 남긴 여운이 다시 음식에 담겨진다. 어떨 때는 '내가 주방 출신도 아니고 자격증도 없는데' 하며 자신 없어 하다가도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미 자신의 마음을 읽은 손님들의 글을 읽고 감동하다 못해 소름이 돋기까지 한다. 손님들은 우연히 이 작은 공간에 들렀다가 그 따뜻함에 반해 이곳을 다시 찾는다. 그래서 '메리고라운드'의 손님들은 90%가 한 번 찾았던 사람들이다. 태정씨는 그들에게 더 큰 디자인으로 보답할 작정이다. 한 가지 더, 태정씨는 언젠가 'M-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수행해볼 생각이다. 'M-프로젝트'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행복해지는 일'이다. 이를테면 환경문제에 대한 작은 실천 같은 것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태정씨가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

돌이켜보면 'W-Girl'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일에 '중독'되어온 삶이었다. 한번 일에 빠져들면 오로지 일만 생각했다. 모든 것이 일로 연관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 어머니의 권유로 6년씩이나 피아노학원에 다녔으면서도 악보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고 그저 미술학원만 졸라대던 아이였다. 자라서는 그렇게 돌아다니며 보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운동만은 유난히 싫어했다. 스키를 타고 내려오거나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면서는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는 그녀였다.

살면서 아픈 일이 없을 리 있겠는가. '사랑과 결혼' 따위를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또 굳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거나 자식을 두지 않겠다는 생각도 아니다. 어릴 적 패션 일을 하던 어머니가 일에 매달리면서 항상 집을 비우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한 적도 있었다. 자라면서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그뿐 아니라 점점 더 닮아가게 된 태정씨였지만, 지금이라도 이왕 결혼을 한다면 아이만은 꼭 낳고 헌신적으로 보살펴주고 싶은 게 태정씨의 마음이기도 하다. 어쩌면 일과 그런 생각의 갭을 극복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수 있을 때 태정씨는 비로소 결혼을 생각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태정씨는 일로 즐겁다.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하다. 태정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의 '달란트' 이야기처럼 인생은 어차피 '도박'(너무 심하면 그냥 '도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수중에 몇 달란트가 있건 그것으로 납작 엎드려 있든 남기기 위해 헤쳐나가든 그것은 순전히 각자 판단의 몫이지만, 태정씨는 한번 해볼 걸 하고 후회할 바에는 한번 해보자는 것이고, 이왕 할 바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한번 해보자는 주의다. 그것도 즐겁게. 그런 태정씨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나도 오래된 내 메리고라운드의 태엽을 다시 감고만 싶어진다.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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