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창종자들]증산 강일순, 민초들에 꿈을 주다

2008. 2. 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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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강증산

1871년 전북 고부서 양반 후손으로 태어나

종교는 꿈이다. 지옥에서 꾸는 꿈이 종교다. 현실이 악몽일수록 꿈은 절실하다. 구한말 이 땅은 숨쉬기조차 힘든 고난의 대지였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모두 같은 꿈을 꿀 때 꿈은 현실이 된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민초들에게 꿈을 주었다.

태생이 운명을 결정했다. 1871년 전북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客望里). 하필이면 후일 동학이 혁명을 일으킨 땅에서 쇠잔해가는 나라의 몰락한 양반의 후손 강일순이 태어났다. 찾아올 손님을 바란다는 객망리의 지명은 본디 선망리(仙望里). 하늘의 신선이 찾아오길 바란다는 마을 이름조차 신비의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늘이 갈라지고 불기둥이 몸을 덮치는 태몽을 꾼 후에 그가 태어났다. 마을 뒷산이 시루봉이라 후에 증산(甑山)이라는 호를 지었다.

동학혁명 실패 예감 참여 안해

고부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다. 하지만 조선 말의 가렴주구는 비옥한 고장일수록 가혹했다. 농사짓는 사람은 늘 굶주렸고 불행은 불만을 끌고 다녔다. 어린시절 총명한 강일순의 눈에는 가난한 땅의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가엾게 비쳤을 것이다. 어느 가을 알곡을 추수하며 새를 쫓는 농부를 보고 어린 그가 어른들에게 했다는 말은 사정을 짐작케 한다. "새가 한 알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마땅히 여기니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살려 보려고 애를 쓸 수가 있을까."

일곱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곧 그치고 만다. 세상과 사정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일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 후에는 가난이라는 짐을 짊어졌다. 품을 팔고 나무를 져다 팔아야 하는 어려운 살림이었다.

10대 후반 시절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색하며 보냈다고 전한다. 파국을 향해 치닫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병폐를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민심은 불온하고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심사도 적지 않았던 때다. 절망을 감당할 수 없을 때 하늘과 땅이 맞붙어 뒤집어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세상은 점차 구세주를 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고부땅에서 난이 일어났다. 갑오년 동학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강일순은 처가에서 마을 훈장을 하고 있었다. 혁명의 와중에 서당 문을 닫고 다시 이리저리 몸을 옮겼다. 그는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감하고 있었다.

동학의 접주였던 박윤거에게 권한 이야기는 동학군의 운명을 고스란히 예측한 것이다. "동학군이 고부에서 난리를 일으켜 황토마루에서 승리하였으나 결국 패망할 것이다. 그대가 접주라고 하니 전란에 휘말려 들지 말고 무고한 생민을 전란에 끌어들이지 말라."

강일순의 행장을 살펴보면 동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줄곧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농민군의 진격 행로를 따라 더러는 사람을 피신시키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에 종군하던 안필성은 행군을 말리는 강일순에게 화를 터뜨렸다. "이리 목숨을 내던지며 백성을 구하려는 마당에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습니까. 게다가 사사건건 불길한 말만 하는 겁니까. 당신은 어찌 이곳까지 왔으며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함께 뜻을 세우지 않는 것까지는 참아도 늘 말리기만 하는 그의 태도에 분노가 치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일순의 대답은 동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연민의 일단을 느끼게 해준다. "어찌 난들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들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불리한 앞날을 보고 일러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아껴 건지려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여기서 동학군들이 많이 희생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찌 구경하러 왔겠는가. 젊은이들의 목숨을 건져보려고 온 것이다."

김항에게서 정역의 원리 배워

세상을 태우는 불길을 끄기에 한 사람의 힘은 너무 벅찰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파멸의 결과.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번민도 심해진다. 동학혁명에 종군하지는 않았지만 강일순은 줄곧 전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동학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지옥문이 열렸다. 관군에 더해 일본과 청의 군사까지 밀려왔다. 혼란이 겹겹이 쌓였다. 살아남은 가족에 비하면 죽은 자들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강일순은 세상의 혼돈을 굽어보리라 길을 떠난다. 20대의 마지막 몇 해를 전국을 다니며 이 땅의 불행과 비극을 절감하게 된다.

여정에서 일부(一夫) 김항(金恒)을 만난 것은 세상을 개벽하려는 증산의 사상을 세우는 데 큰 전기를 만들었다. 김항은 동학(東學)의 최제우와 남학(南學)의 김광화와 함께 동문수학한 학자다. 최제우와 김광화는 관에 잡혀 처형당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들은 유교의 경문을 공부했으나 세상의 도탄을 구제하기엔 힘에 겹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찍부터 선가(仙家)와 불교에 눈을 돌렸고 주문과 종교적 신비에 빠져들었다.

김항은 특히 주역에 심취했다. 시대가 바뀌어 주역의 수리원리가 뒤바뀌었음을 주장했다. 정역(正易)을 주창한 것이다. 하늘과 땅이 개벽하여 일어난 천지(天地)의 시대가 땅과 하늘의 지천(地天)의 시대가 됐다고 가르쳤다. 선천(先天) 시대의 원리로는 후천(後天) 시대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니 새로 교의를 세웠다고 했다.

전하기로는 김항도 매일 관촉사의 미륵불 앞에서 기도하였고 강력한 종교적 신비를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정역의 사상을 펼치면서 우주와 생명의 조화 원리를 꿰뚫어 안 유일한 사람이 자신임을 전파했다. 김항의 사상은 후에 생겨난 민족종교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마음이 하늘까지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됐음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강일순은 1897년 김항을 만났다. 며칠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무엇엔가 두 사람의 뜻이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이때부터 강일순의 발길은 전라도를 벗어난다. 충청도 경기도에서 황해도 평안도를 둘러 함경도 강원도를 찾았다.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를 다시 돌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이 서른이 된 해였다. 정역의 원리를 배우고 순례의 기간 사람들의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방식을 익혔다. 이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그는 신비로운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서 보여준 이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세상을 이루는 복잡한 원리를 읽어낼 줄 알았고 마음의 갈피를 뒤져 필요한 지혜를 찾아내는 법을 터득했다. 3년 동안 전국을 돌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 자각했다. 고향에 돌아와 그가 한 일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명상하고 주문을 외우고 울부짖는 일이 고작이었다. 세간의 몰이해 속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운명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결국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동학이 휩쓸고 지나간 후라 고부의 관은 예민했다. 남다른 모습이 보일라치면 세상을 현혹한다는 명목으로 잡아들였다. 산에서 기도하며 지내는 강일순의 행적도 당연히 혹세의 죄목으로 다스릴 대상이 됐다. 몇 차례나 체포의 고비를 넘기고 기도를 끝내자 그는 산을 떠났다.

모악산 대원사서 49일간 정진

강일순이 찾아간 곳은 금산사의 말사인 모악산 대원사. 이곳이야말로 증산의 종교적 출발점이 된 곳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태어났다. 증산은 대원사의 방 하나를 얻어 49일간 정진한다. 먹지도 않고 바깥 출입도 없이 목숨을 건 수도가 이루어졌다. 가장 귀한 것을 버릴 각오가 된 자는 더 귀한 것을 얻는다. 모세와 붓다, 예수와 마호메드도 그랬다. 생명을 내던지고 세상을 구제할 지혜와 용기를 구하는 것이다.

49일 동안 자신과 맞부딪치며 증산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욕심과 성냄, 음란과 어리석음을 떠나 천하를 바로잡는 도를 깨우쳤다. 대원사를 나와 증산은 세상을 향한 공사(公事)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오직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라고만 했다.

자기 앞에 놓인 가혹한 여정을 절감하고 있었을까. 증산은 그를 따르던 이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이 일을 맡으려 함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잡지 못한다 하니 괴로우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내가 맡지 않으면 천하는 비겁에 쌓여 운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부귀나 종교적 권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교세를 불리는 일에 힘을 쓰지 않았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집안을 돌보는 평범한 삶을 살아달라는 아내의 당부를 오히려 나무랐다. "천하를 위하려 하오. 천지를 바로잡고 세계의 창생을 건지려는 나에게 집에 머물라 권하오."

이후 줄곧 금산사 아래 동곡 마을을 중심으로 지내며 뜻을 펼친다. 광제국(廣濟局)이라는 약방을 열고 병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뜻을 세운 것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기 위해 결국 하늘도 뜯어 고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누구도 고쳐주지 못했던 민초들의 하늘을 고치며 지냈다. 세상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늘도 잘못되었으니 당연히 바로잡아야 할 일이라 애쓴 것이다.

낡은 것으로는 새 세상을 맞을 수 없으니 증산의 뜻은 분명했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 행할 것이 아니니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낡은 집에 그대로 살려면 엎어질 것이니 불안하여 괴롭게 살 것이니라. 우리는 개벽해야 하나니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없고 지금도 없는 일이요. 선천을 뜯어 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그의 가르침을 쫓아 사람들이 모이면서 증산은 많은 고초를 겪는다. 개인적인 원망을 당할 때는 묵묵히 받아들여 오해를 사라지게 했다. 결국 의병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에 이르렀다. 1907년 사람들과 함께 투옥되어 40여 일을 갇혀 지냈다.

이때 당한 혹독한 고문은 후에 사망의 원인이 됐다는 추측을 낳게 했다. 의병이냐는 추궁에 증산의 대답은 단호했다. "의병이 이씨 왕가를 위하여 일본 병사에게 항거하는 것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혼란하고 멸망에 가까운 때를 맞아 천지를 개조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려 한다. 진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시달리는 민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천지를 고치는 공사를 시작한 지 9년 만에 강증산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하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라.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늘 혹세무민하지 말라 가르쳤고 병든 것을 낫게 하려고 애쓰던 길지 않은 삶이 저물었다.

그래도 그가 꿨던 꿈은 백일몽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절망에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결정된 운명을 강요하는 하늘이 아니라 마음을 써서 바꿀 수 있는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과거의 영광만 돌아보며 무지와 원망 속에서 살지 말고 하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한 것을 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은 서로 다투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터라는 것이 강증산이 열어주려 한 이 땅의 모습이다. 그 꿈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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