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연기인생 50년 맞은 '국민배우' 안성기

2007. 12. 2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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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여년간 특정 캐릭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해 온 배우 안성기는 후배들에게 철저한 자기관리와 티내지 않는 노력을 조언했다.

가는 해 2007년은 '국민배우' 안성기에겐 영화 인생 50주년인 해다. 그도 나이 먹는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채 세월이 간 것은 그가 '회고전'이라든가 특별행사 등 왁자지껄하게 한판 벌이며 기념하는 성격이 아닌 탓도 있지만, 항상 '변함없이 성실하게' 우리 곁을 지켜온 이유가 더 크다.

호적에 오른 그의 생년월일은 1952년 1월 1일이지만 실제 나이로는 한 살이 많다. 그래서 '한국식 나이'로 치자면 쉰일곱 살인데, 세 밤을 자고 나면 새해이니 쉰여덟 살이 되는 셈이다. 본인은 철저히 호적 나이로 생일을 센다지만….

영화연구가 정종화 씨에 따르면, 그가 데뷔한 지 정확히 50년이 된 날은 지난 10월 31일이다. 1957년 이날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를 통해 아역으로 데뷔한 안성기는 서울 국도극장에서 관객과 처음 만났다. 이후 올여름을 뜨겁게 달군 '화려한 휴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려 140여편의 영화를 통해 관객과 교감을 나누어왔다.

대통령 선거일 다음날인 지난 20일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당초 그에게 50주년 기념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지난 10월 23일 밤, '마이 뉴 파트너' 제작이 한창이던 경남 남해 힐튼리조트에서였다.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자리가 마련된 것은 정말 바쁜 그의 일정 때문이다. 때가 때인지라 앞으로 들어설 새 정부에 바라는 영화정책부터 먼저 물었다.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DVD나 비디오 등 2차 시장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극장 개봉만으로는 수지 맞추기가 부담스런 일이 되었지요. 게다가 투자는 안 이뤄지고 마케팅 비용이 올라가다보니 제작의 안정적인 분위기가 갖추어지지 않는 겁니다. 다운로드 유료화 및 관람료 현실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합니다. 스크린 쿼터 축소 또한 성급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우리 영화가 반짝하고 커나가는 시점인데 벌써 이를 논할 단계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아직은 한국 영화 수익에 관한 평균치를 산정할 수 없어요. 몇 년 후 확실한 그래프가 그려진 다음에 결정할 문제죠.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제도를 만들어 2차 시장을 형성하고 적극 지원해야 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영화계의 자성 또한 촉구하고 나섰다.

"손익분기점(BEP)을 내려야 해요. 허리띠를 졸라매야죠. 상승된 제작비부터 끌어내려야 합니다. 마케팅 비용이 제작비의 30%를 넘어선다는 사실은 자기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거품을 없애면 해답이 보일 것입니다. 한국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고 배우들의 능력 또한 아시아 정상급인지라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또 상업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로서 영화를 키워나가는 분위기 조성에도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국민배우 안성기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꼼짝마라'고 옥죄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배우 인생을 마디마디 나누자면 6기로 쪼갤 수 있을 듯하다. 데뷔에서 중학생 때까지의 아역 시절이 1기다. 그는 1959년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이 시기 한국을 대표하는 아역 배우였다. 이후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한 뒤 ROTC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네 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때를 2기로 볼 수 있다. 3기는 '바람불어 좋은 날'(80)을 시작으로 '고래사냥'(84)과 '깊고 푸른 밤'(85)으로 이어지는 5년간이다.

"아역의 이미지를 벗고 성인배우로 변신에 성공한 영화가 '바람불어 좋은 날'입니다. 서울 변두리로 올라온 세 청년의 이야기인데, 당시 부동산 투기 등이 이루어지면서 자본에 피해당하는 여성들의 아픔을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였죠. 그 뒤 곧바로 '만다라'에 출연했고, 지식인들과 일반 관객들이 많이 본 덕에 흥행배우로 인정받았어요. 남녀노소 모두로부터 호평받은 '고래사냥'은 명절 때면 어김없이 TV로도 방영됐죠. 미국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깊고 푸른 밤'은 '한국 영화도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라는 인상을 심어 준 영화입니다. 당시로서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할리우드 영화풍의 색조와 스타일이 국내 영화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지망생들에겐 '하면 된다'는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이 시기 이장호 감독은 그를 '의식화'시켰고, 배창호 감독은 그에게 '연기의 여유'를 가르쳤다. '겨울 나그네'(86)에서 '그대 안의 블루'(92)까지 4기에는 신승수 곽지균 이명세 정지영 박광수 장선우 강우석 이현승 등 다양한 실력파 감독들과 함께 일했다. 5기는 '투캅스'(93)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99) 이전까지, 그리고 6기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래 현재까지로, 그는 역할보다는 깊이에 비중을 두면서 캐릭터를 더욱 강화해 나가고 있다.

그는 한국 영화가 상승 무드를 타던 50년대 말에 입문해 황금기로 불리던 60년대를 맛보고, 급격히 하강곡선을 긋던 70년대 말에 돌아와 80년대의 격변기와 90년대의 산업적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쉬리'에 이어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 르네상스의 중심에도 서 있었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해방 이후 한국 영화의 질곡과 변화를 견디어 온 유일한 배우다.

"60∼70년대 '충무로 방식'의 제작 시스템에 따라 지내오다가 90년대 초 '기획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대기업의 자본이 들어왔어요. '얼굴'도 스태프도 바뀌는 과도기에 제게도 변화가 필요했었죠. 한석규, 최민수 등 새로운 인물들이 영입되면서 그동안 주인공을 독식해오다시피 한 나의 몫이 줄어들었어요. 같이 어울리며 90년대 중후반을 보내고 IMF를 거친 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이르러선 주연이지만 조연 같기도 한 역할들이 들어오더라구요. '아, 내게 요구하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꼈고, 역할이 작더라도 작품만 좋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지금까지 온 겁니다. 가만 보면 한결같이 왔어요. 다행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겠지만, 흥행에 상관없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품, 고생하며 찍은 작품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80년대 영화들은 대부분 힘들었어요. '어둠의 자식들'은 서울역 앞 사창가가 남아 있을 때 찍었는데 밤에 '짱돌'이 날아들기도 했죠. 술 취한 구경꾼들이 던진 것인데, 70년대 말 영화를 통해 할 이야기를 제대로 못했던 탓에 관객들로부터 환영을 못 받았던 이유죠. 특히 80년대 초 컬러TV가 보급되기 시작한 데다 스포츠가 부흥하는 바람에 영화는 더 위축되고…, 뭘 해도 어려웠어요. '꼬방동네 사람들'처럼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드러내 보인 작품은 해외영화제에도 못 나가게 했었죠. 이장호, 배창호 감독이 지금 활동했다면 해외에서 크게 인정 받았을 것입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의 경우는 영화의 반 이상이 삭제되어 '아름다운 영화'로 돌변하기까지 했습니다. 호스테스물이나 계몽영화 아니고는 문제 되고 짤리고… 암흑기였습니다. 의미를 지닌 영화로는 '남부군'과 '하얀 전쟁'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꼭 다루어야 할 이야기를 했다는 점입니다. 빨치산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았고, '귀신 잡는 해병'을 돈에 팔려 간 용병으로 전락시킨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었죠. 육체적 고통도 잊을 수 없죠. 계절을 기다리느라 2년이 걸린 '남부군'은 겨울 장면을 오대산에서 찍었는데 불도 피울 수 없고 차디찬 계곡물에 들어가야 했거든요. '하얀 전쟁' 때는 베트남의 숙박 여건이 비루한 데다 막 조립한 헬기를 타야지, 뱀 나오고 전갈이 왔다갔다 하지…, '무사'를 찍을 땐 중국에서 소품 의상 한 벌로 5개월간 버텼는데 땀에 절고 햇빛에 바래 꼴이 말이 아니었죠. 하지만 그 고생이 결국 그 필름에 묻어 나더라구요."

◇안성기의 출연작들. 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 '화려한 휴가' '고래사냥' '투캅스' '바람불어 좋은 날' '겨울 나그네' '실미도'.

오늘이 있기까지 항상 그의 곁을 지켜 준 지인들은 누굴까. 그는 작가 최인호를 우선 꼽는다. 삶의 지혜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형이기 때문이다. '돈 따라 다니지 말고 일 따라 다녀라'라는 '말씀'을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 새기고 있단다.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말도 있어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란 말이다. 먼 사람은 원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아내, 부모, 자식들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가슴에 박히지 않나요?"

후배 박중훈은 20년 남짓 지내오면서 늘 자신을 존중해주고 따라줘서 고맙고 해주는 것보다 받는 게 많은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든다고 털어놓는다. 친구 이춘연 대표(한국영화인회의)는 "어딜 갈 때면 '깜장' 양복 입고 나타나 마치 내 매니저처럼 나서주고, 영화쪽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좌중을 즐겁게 해주는 보석 같은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충무로의 실력자' 강우석 감독과도 편한 사이다.

"제 아내가 대학원 제자 가운데 한 분을 소개해 강 감독이 결혼했어요. 하하하."

물론 이장호, 배창호 감독은 그에게 특별하다.

"두 분은 한국 영화를 키운 주역들입니다."

안성기는 가정적인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흔하다는 부부싸움조차 피해 갈 것 같아서 그에게 '가족경영의 원칙'을 묻자, 무조건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답한다.

"우선 가장으로서 역할에 충실해야죠. 돈도 벌어와야 하고 명예도 지키면서. 바깥을 우선시하다 보면 집안이 차가워집니다. 저는 사실 가정적인 사람이라기보단 가정에 오래 있는 사람이에요. 빨래나 청소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냥 집에 오래 머무는 겁니다. 그러다 촬영 때는 보름 이상 몇 개월 동안 집을 비우는 탓에 아내의 계획과 생활 리듬이 깨집니다. 제게는 당연한 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게 가장 중요하죠. 부부싸움요? 인간인지라 가끔 하죠. 이때는 한쪽이 먼저 사과해야만 하는데 제가 합니다. 나도 기다리고 아내도 기다리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힘들어져요."

그의 두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 중이다. 첫째 다빈(19)은 조각가인 엄마 오소영씨를 닮아 뉴욕에 있는 미술대학에 들어가 그림을 전공하고 있고, 중3인 둘째 필립(16)은 보스턴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제 곧 환갑을 맞는다. 산다는 건 뭔지, 인생론을 따졌다.

"나이가 들수록 쉬운 게 없구나, 앞으로도 쉽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촬영하면서도 생각하죠. '야, 쉬운 장면이 하나도 없네.' 인간 관계도 그렇고."

하지만 그는 배우로 사는 것처럼 행복한 건 없다고 말한다.

"배우는 늘 새롭잖아요. 촬영의 메커니즘은 똑같지만 매번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이 있어요. 좋은 여행에는 감동도 따르구요."

완벽한 삶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실수도 하고 말썽에 휘말리기도 하는 게 인생 아닌가.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선배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정답과 오답의 행로를 보아왔습니다. 어떤 길이 정답인지를 알면서 틀린 길로는 갈 수 없잖아요. 제 생활이 무미건조해 보인다고 말하지만 저는 제가 사는 방식이 가장 편합니다."

그는 '국민배우'라는 별칭이 사실 불편하다고 말한다. '국민'이란 단어를 붙여서 '꼼짝마라' 하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단다. 너무 규격화해 놓은 거 아닌가. 물론 그런 의미에서 붙인 건 아니지만. 배우의 역할에 보다 충실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국민'을 빼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일희일비하지 말 것. 연기는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거니깐. 대신 자기한텐 철저해야 함.

그는 보기와는 달리 잡기에 능하다. 오히려 잡기를 떨쳐내느라 힘들단다.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데 너무 빠져들게 될까봐 일부러 낚싯대를 들고 나간 적은 없다. 그리고 아내가 즐기지 않고 자신만 좋아하는 것은 되도록 안 하기로 했다. 골프는 아내와 함께 즐긴다. 바둑도 현장에서 두다 보면 밤 새울 때가 많다. 게임을 즐기고 운동이라면 보는 것까지도 좋아한다. 사실 그동안 아내와 함께 제대로 여행 한번 다녀오질 못했다. 예전에 CF찍을 때 같이 간 경우를 빼면. 가족여행도 일본 유바리 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할 때 3박4일 대동한 게 전부다.

안성기. 그는 누구에게나 겸손하다. 자신을 낮출 줄 알며 언행은 교만하지 않다. 그는 성실하다.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았고 한 캐릭터로의 박제화를 거부해왔다. 그는 따뜻하다. 수많은 경조사를 직접 챙기는가 하면 유니세프 친선대사 등 봉사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그는 절제를 실천한다. 최고의 출연료를 받는 것 같지만 자신이 정한 수준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여기에 '티 내지 않는 노력'과 '지독한 자기관리'를 보태면,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해 온 비결이 나온다.

이제는 '한국 영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그가 폴 뉴먼처럼 일흔 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매력을 지닌 채 촬영 현장을 누빌지 지켜볼 일이다.

글 김신성·사진 이제원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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