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얼굴 9살 러블린의 고향은 서울 "떠나야 하나요?"

2007. 12. 2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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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2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초등학교 4학년 1반 교실. 겨울방학을 앞두고 들뜬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교실에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꾸며진 교실 뒤편으로 러블린(9·여)이 풀 죽은 모습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교실에서 유일하게 까만 얼굴에 레게머리를 한 러블린은 국적이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다. 하지만 러블린은 서울 은평구 연신내의 한 산부인과 의원에서 태어났다. 1997년 기업투자(D-8) 비자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국에 왔고, 이듬해 러블린이 태어났다. 김치만으로 밥 한 공기를 먹어치우고 보쌈과 미역튀김 반찬을 가장 좋아하는 러블린은 말하는 것은 물론 입맛이나 붙임성 좋은 성격까지도 완전한 한국 사람이다.

9살 러블린 고향은 서울…떠나야 하나요?

이날 러블린이 풀죽은 이유도 친구들의 놀림이나 왕따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이미 날려버린 러블린이다. 지난달 남동생 추쿠달루(8)와 함께 학교 대표로 참가한 전국 무용대회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영웅'이 됐다. 같은 반 친구인 동혜빈양은 "러블린이 학교 체육대회 달리기에 반 대표로 나갔는데, 완전히 스타였어요"라며 연방 치켜세울 정도다.

그러나 얼마 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다녀온 어머니한테서 "23일까지 출국해야 한단다"라는 말을 들은 뒤 러블린은 웃을 수 없었다. 러블린은 강제 출국을 앞둔 이방인이 된 것이다. 사업이 어려워진 아버지가 사기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지난 5월 강제 출국됐고, 어머니가 신청한 비자마저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지하 단칸방에서 러블린을 비롯한 아이 다섯과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 우카마카(36)는 "지금 나이지리아로 돌아간다면 아이들이 학교를 못 다닌다"며 "아이들이 여기에서 학교를 마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웃 강효숙(51)씨는 "러블린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동생들을 보살피는데다 언제나 밝은 표정이어서 너무 예쁘다"며 "나이지리아로 가기 싫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도 발벗고 나섰다. 러블린의 담임인 김진한(39) 교사는 지난달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탄원서를 보냈다. "외롭고 따돌림 속에서만 살아온 러블린이 이제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하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몰라 저도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어린 러블린에게 나라의 법을 운운하기도 쉽지 않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러블린이 4학년 과정이라도 우리와 함께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 친구들도 "이름처럼 사랑스러운 그런 아이를 조금만 더 있게 해주세요"(김경태), "러블린은 꼭 가면 안 되는 우리들의 친구예요"(동혜빈) 등의 내용을 담은 그림편지를 보냈다.

이런 정성 덕분인지 출입국관리사무소 지난 21일 오후 러블린 가족들의 출국 기한을 내년 2월까지 늦춰 줬다. 하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 쪽은 "지난 8월 비자가 만료된 뒤 이미 여러차례 기한을 연장해 줬다"며 "더 조처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날 러블린과 함께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다녀온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러블린은 나이지리아에서도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며 "아무런 죄 없이 한국에서 태어나 잘 적응해 사는 아이를 강제 출국을 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블린 가족을 도와온 '용산 나눔의 집' 최준기 신부는 "정부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다른 나라들처럼 속지주의 국적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살고 싶은데, 비자를 더 주면 안 될까요?"라고 묻는 러블린의 커다란 눈에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비쳤다. 한국에서 러블린은 "원더걸스 같은 가수가 되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나이지리아에는 얼음도 없다는데, 늦기 전에 꼭 다시 한번 스케이트장에 가보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만 이루고 떠나야 할까. 이순혁 기자<ahref"mailto:hyuk@hani.co.kr">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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