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위의 작업실](10)실용커피 가이드③ 멋으로 맛을 만드는 일

2007. 12. 1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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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

날 항상 매혹시켜온 것은, 내 인생을 불태우는 것이다.

흡입하고 마시고 정신을 잃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이 치사하고 더럽고 잔인한,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이 기괴한 노름을 마음껏 즐기면서

나는 그 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랑수아즈 사강

하지만 그런 사강도 법의 손아귀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예순 살의 소녀 작가 사강은 코카인 흡입으로 법정에 서게 되자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습니다."

한국 소설가 김영하는 그 선언을 제목으로 소설을 썼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누군들 사강처럼 인생을 불태우고 싶지 않으랴. '치사하고 더럽고 잔인한 우리 시대'라는 표현에 뜨거운 공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자기를 파괴할 권리, 그것도 천부인권의 하나일까. 어떤 불안감이, 혹종의 문화충격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독약

사강의 자기 파괴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죽는 방법이 있다. 들입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단, 위장이 좀 넉넉해야 한다. 한꺼번에 80잔 이상을 마셔야 하니까. 커피 속 카페인의 분자식이 C8H1ON402란다. 그거 한방에 10g을 털어 넣으면 황천으로 간다. 일반 커피잔으로 80잔 정도가 10g이다. 와우!

그러니까 커피는 독약이다. 조금씩 천천히, 한평생에 걸쳐 죽여주는 독약이다. 몸이 아픈 시인 최승자는 죽음 대신 '네게로' 간다고 썼다.

'물에 풀리는 알코올처럼, 알코올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모르핀, 코카인, 필로폰까지는 몰라도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의 자유쯤은 누리고 싶다. 건강과 장수라는 욕심 사나운 현대병에 맞서 우아하게 자기를 파괴하는 권리 추구이다. 문득 아픈 시인의 시가 '내게로' 온다.

◆C8H1ON402 중독증

250㎎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 10% 정도의 사람에게서 불안, 초조감, 안절부절못함, 홍조, 다한증, 이뇨작용, 손발의 따가운 느낌, 구역, 구토증 등이 나타난다. 1g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는 극도의 불안, 초조감, 정신착란증, 환청과 부정맥이 있을 수 있다. 10g 이상에서는 전신발작, 호흡부전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영혼의 상처 없이 문학은 가능하지 않다. 커피는 한 잔의 문학이다.

◆심플

나에게 커피는 에스프레소를 의미한다. 간간이 드리퍼로 내리거나 사이펀으로 끓이기도 하니 커피와 에스프레소라고 병렬하는 게 낫겠다. 그만큼 에스프레소의 존재감은 크다. 통상 하루에 대여섯 잔, 과할 때는 열 잔을 넘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정신착란이나 환청 증세가 찾아와 주지는 않는다. 원샷으로 털어놓고 일이십 분 유지되는 뱃속의 열기를 즐길 따름이다.

소주를 즐겨하던 장욱진 화백은 안주를 전혀 먹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에 소금을 올려놓고 조금씩 핥아먹었다. 그런 자신을 두고 화백은 '나는 심플하다'고 썼다. 원샷의 에스프레소. 나도 심플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심플, 그것이 쉬운 경지는 아니다. 강하고 진하고 끈끈한 것이 에스프레소인데 더불어 심플까지 바라다니. 하지만 때론 형용 모순이 진실이다. 심플.

◆에스프레소 머신

지금은 두 대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업실 이쪽저쪽에 놓여있다. 망한 카페 주인에게서 인수한 파에마 S1 모델과 이소막의 헥사곤이 현역기로 활약 중이다. 호텔 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파에마는 고전풍으로 담담하게 생겼고, 번쩍번쩍한 크롬보디로 이루어진 헥사곤은 이름 그대로 육각형의 현대미술품이다. 성능도 중요하지만 바라보는 즐거움도 그 못지않다.

◆인연

인연이 사람간의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물건에도 연이 닿고 안 닿는 일이 어찌나 생기던지. 커피 머신계의 최대 메이커인 가찌아와 계속 어긋난 과정을 생각하면 실소가 터진다. 가찌아 사의 첫 구입품 파로스는 그라인더의 굵기 조절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 친절하기만 하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게 만드는 이탈리아 판매원 녀석과 국제전화를 네 번이나 해야 했다.

영어가 짧은 나 대신 줄리아드 음대와 예일대 경제학과 친구가 통화를 맡아줬다. 정말이다. 친구들 중에 무시무시한 고학력자만 선발해 통화를 맡겼는데 별로 도움이 안됐다. 줄리아드와 예일대가 별 볼일 없는 학교였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로 가찌아(Gaggia)를 빨리 발음하면 '가짜'가 되고, 1901년 최초로 에스프레소 기계를 고안해 낸 이탈리아 사람 이름은 '배째라(Bezzera)'이다.

미련하게도 미련을 못 버려 계속 같은 회사의 베이비, 클래식, 신제품 아킬레까지 여러 모델을 차례로 구입했었다. 모두 금방 사라져 버렸다. 망가지거나 마음에 안 들거나. 역시 인연을 탓할 수밖에.

혹시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면 두 가지를 유의하라. 첫째, 몸체가 육중한 철제여야 한다. 둘째, 전자동은 피하라. 수동이거나 최소한 반자동이어야 사용자의 취향을 다양하게 반영할 수 있다. 국내 백화점 구입은 비추. 인터넷으로 국제 시세 알아보면 황당해진다.

◆멋

널찍한 작업실에서 홀로 과정이 약간 복잡한 에스프레소를 만들고 있노라면 그런 나 자신이 참 멋지다는 기분이 든다. 내친김에 바리스타들이 착용하는 특유의 긴 앞치마와 레이스가 달린 셔츠와 좀 묘하게 생긴 두건형 모자까지 장만했다.

아는 인간들이 찾아왔을 때 그 차림으로 나타나보니 대략 세 종류의 행동 특성 가운데 하나가 나타난다. 하나, 자빠진다. 둘, 엎어진다. 셋, 데굴데굴 구른다. 공통점으로 깔깔깔 미친 듯이 웃어댄다. 아쉽지만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만 바리스타 복장을 하게 됐다. 그래도 상관없다. 에스프레소는 멋으로 맛을 만드는 일이다.

◆드립포트

커피든 차든 물이 중요한 건 상식인데 연수인 수돗물로 충분하다. 다만 소독약 냄새를 걸러줘야 하는데 주전자 형으로 생긴 값싼 간이정수기도 의외로 괜찮았다. 내 경우 브리타 제품으로 꽤 여러 해를 견뎠다. 지금은 배관시설을 별도로 해서 뱀처럼 구불구불한 일곱 단계의 필터를 거치는 전문 설비를 사용한다. 한데 이 요란한 설비와 브리타 간에 가격만큼 엄청난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물은 그렇지만 물을 조절하는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드립커피를 즐긴다면 주둥이가 좁고 긴 전용 드립포트를 장만해야 한다. 배우는 데 10년 걸린다는 커피 전문가의 기술이 드립할 때 물줄기를 조절하는 능력을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줄기의 양과 속도 그리고 온도를 맞추는 데 드립포트는 필수품이다. 처음에 약간 적시고 30초 기다리고, 그 다음 대략 1분에 걸쳐 몇 차례 나누어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리며 물을 내린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데 가장자리에는 물을 붓지 않고 중심부에만 골이 패도록 만든다.

◆기도문

자기를 파괴할 권리를 주장하는 작가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건강 염려에 벌벌 떤다. 건강을 통해 무얼 한다기보다 아예 건강 자체가 목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커피조차 몸에 해롭다고 극력 피하는 사람이 흔하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할 바 아니지만, 거의 신앙화한 건강 장수가 나는 끔찍하다. 거리거리에 난무하는 신흥종교의 기도문. 부우자 되세요, 서엉공하세요, 오오래 사세요…. 미쳐 펄럭이는, 웩.

〈글/김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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