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돌주먹' 김태식 "박찬희와 흑백을 가리고 싶었다"

2007. 10. 2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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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테크닉의 소유자도 아니고, 챔피언 기간이 길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단연코 한국 최고의 인기 복서로 꼽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160cm 남짓한 키가 무색할 만큼 어마어마한 펀치력으로 온 국민의 가슴 속에 불꽃을 새겨놓은 작은 거인, 김태식 전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인데요.

배고프고 힘들 때, 부와 명예를 쥐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했다는 복싱…. 하지만 그에게 복싱은 마냥 달콤하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세계챔피언의 영광은 화려했지만 덧없이 짧았고, 남겨진 부상의 흔적과 마음의 상처는 지루하게 길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다시는 복싱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천상 복서일 수밖에 없는 그는 결국 다시 링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김태식 복싱짐'을 개관한 작은 거인, '돌주먹, 독일병정'이라고 불리던 파이터, 짧고 굵게 세계챔피언의 영광을 누렸던, 김태식 전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을 10월 22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습니다.

◇ '김태식 복싱짐'으로 돌아온 한국의 돌주먹

▶ 링 위에서의 김태식 선수의 모습이 생생한데 벌써 쉰이시라고요?

올해로 51살이 됐죠.

▶ 건강은 어떠세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우리 같은 선수는 최대한 몸 관리를 잘 해야 노후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거든요. 제 나름대로 몸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 몸집이나 얼굴은 소년 같으신데 손은 정말 대단하세요.

체력도 많이 떨어지고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운동하고 있지만 옛날 같지는 않죠.(웃음)

▶ 엄지손가락이 불편하시다고 들었어요.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운동을 못하게 됐어요. 결국 손을 절단해야 운동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는데 노력을 했더니 손 절단하지 않고도 운동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른 선수들보다 굉장히 고통이 심했죠.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손가락 하나로 인해서 기절을 할 정도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게 큰 부상이었기 때문에 바로 치료를 했어야 하는데 못해서 손과 뼈가 응고가 되어서 손이 그렇게 된 거죠.그래서 손을 못 쓰는 상태에서 저만의 타법을 이용한 거예요. 오른손을 치켜들어서 밑으로 내리꽂는 식의 주먹질을 하게 되었고 거의 오른손은 쓰지 못하고 왼손 하나로 했다고 봐야죠.

▶ 최근에 '김태식 복싱짐'을 개관하셨다고요. 근황을 얘기해 주세요.

운동 이후에 사회생활도 해 보고 장사도 해 봤는데 결국은 나도 권투인이라고 생각이 드니까 50이 돼서 저의 집인 체육관으로 돌아왔습니다. 후배양성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시대와 좀 안 맞다 보니까 제가 생각한 권투나 복싱이 많은 변화가 있더라고요.요즘 젊은 세대들의 인식이 저희 세대와는 틀리다보니까 체육관 운영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좋은 선수를 발굴하려면 제가 보는 선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게 달라서 어려움도 있고요.

현재 흐름이 K-1이라는 격투기 쪽으로 가다 보니까 권투가 많이 침체가 됐어요. 복싱을 하려면 기질이나 소질, 승부근성이 있어야 하고 또 권투는 다른 운동에 비해서 하체보다 상체가 발달이 되고 일반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몸매가 있습니다.

축구의 근육과 권투의 근육이 많이 틀리거든요. 권투에서의 근육은 굉장히 짧은 거리를 순발력 있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굵은 다리보다는 가는 다리가 유리하고 중량도 다리가 가늘면 덜 나가기 때문에 아무래도 유리합니다.

▶ 권투하면 헝그리 스포츠라고 하는데 요즘 헝그리한 젊은이들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 환경변화 때문에 선수층이 점점 얇아지는 것 같아요.

전 세계적인 흐름이에요. 권투와는 다른 스포츠로 방향을 전환하고 또 우리나라가 그런 쪽에 특히 예민한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중에서 좋은 선수가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순수하게 권투가 좋아서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선수가 나올 거라고 자신하고 있고 좋은 선수를 발굴해서 멋진 시합을 선을 보일 것 같습니다.

▶ 주먹만 사용하는 복싱에 비해서 K-1은 손과 발을 다 사용하는 다이내믹한 경기잖아요. 그래서 복싱이 되겠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일단 우리나라 사람들이 격투기를 좋아합니다. 권투가 침체되다 보니까 K-1이라는 격투기로 돌고 있는데 저도 한 때 선수생활 했던 사람 입장에서 이렇다 저렇다 할 건 못 되고요.저는 개인적으로 크게 관심이 가지는 않더라고요. 저희 때만 해도 15R까지 갔었는데 82년 김득구 선수가 사고로 인해서 사망하고 나서 이후부터 12R가 됐어요.

우연의 일치로 김득구 선수가 강원도 고향 후배인데 제가 82년 9월 4일 대구에서 머리를 다쳤어요. 저는 운 좋게 살아났고, 살아났다 할 때 김득구 선수가 다치거든요. 그때가 아마 9월 11일이었을 거예요. 강원도 권투 선수들이 많지는 않은데 같이 다친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 동양의 호랑이, 5분 11초 만에 KO승

▶ 1980년 장충체육관에서 WBA플라이급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를 쓰러뜨리고 세계챔피언을 거머쥐었죠. 순식간에 끝나버렸는데 얼마 만에 끝난 건가요?

제가 1R를 마치고 2R에 바로 쫓아 들어가서 결정을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2분 11초였어요. 정확한 공격타수는 잘 모르겠지만 이백 몇 발은 했다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어요. 5분 11초 동안에 공격타수가 그렇게 나간 거죠.

▶ 1R를 해 보니까 허점이 보이던가요?

사실 지금 와서 말씀드리지만 체력이나 제 조건상 여러 가지로 그 선수한테 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당시에 우리나라가 굉장히 암울한 시대였기 때문에 큰 비즈니스가 잘 안 되었어요. 중간에 매치 몇 개가 끼어서 시합이 벌어지는 상황인데 그때 제가 처음 타이틀 매치 계약을 했을 때는 천운이었어요. 그런 천운을 놓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시합을 하자니 몸 상태도 안 좋고 또 '이바라'라는 선수가 너무나 완벽한 선수였기 때문에 저로서는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천운의 기회는 영원히 없어질 수도 있었기에 나름대로 계산을 했죠. 길게 가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고 더군다나 더운 지방에서 온 선수이기 때문에 시합일이 80년 2월 17일이니까 구정 다음날이었다고요. 날씨도 춥고, 기온이 떨어져 있는 상태니까 열대 지방에서 온 사람은 추위에 약하잖아요.

제 나름대로 그 부분을 노리고 4,5R에서 결판을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어요.그게 어떻게 운이 좋게 적중이 된 것 같아요.지금은 다 지난 이야기인데 그 사람도 엄청나게 기초체력이 강하기 때문에 저희들과는 또 주먹이 틀려요.

동양권의 선수들과는 또 틀려서 엄청나게 파워도 있고 더군다나 당시에 글러브는 맥시칸 글러브라서 국내에서는 안 끼는 거예요. 그런 걸로 맞으니까 엄청난 고통이 따르죠. 다만 홈 링에서의 이점은 생각하죠. 아무리 강한 선수라도 적지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밀리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아마 짧은 기간에 챔피언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저 나름대로 열심히도 했고요.

▶ 그 선수가 지고 나서 뒷얘기는 없었나요?

저도 사람이다 보니까 개인적으로 그 선수가 가기 전에 한 번 만났어요. 이바라라는 친구가 얼굴을 흔들면서 안 그래도 눈이 큰데 더 커지면서 저 보고 호랑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그렇게 매 맞아보기는 처음이라고 하는 걸 통역관을 통해서 들었어요.

▶ 챔피언을 따고 나서 누가 처음으로 생각나던가요?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생각은 안 나고 나도 챔피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은 했죠.

▶ 당시에 상대 선수가 너무 강해서 김태식 선수를 못미더워하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거의 다 그랬어요. 그것 때문에 말도 많았고요. 안 되는 선수를 구태여 이 어려운 시점에 달러를 버려가면서 할 수 있겠느냐는 여론이 많았죠. 컨디션도 안 좋았어요. 왜냐하면 그때 운동을 많이 하다 보니까 허리에 무리가 생겨서 척추 사이에 살이 끼어들어서 엄청나게 고통이 심했었어요. 서면 앉지 못하고 앉으면 서지 못하는 그런 악조건의 상태였지만 선수의 인생에 단 한 번의 기회가 왔기 때문에 울면서 시합했던 거죠.

◇ 진검승부 가리고 싶었던 박찬희, 실제 대결은 못 해

▶ 김태식 선수와 같이 활약했던 선수가 누구였나요?

박찬희 선수, 김철호 선수도 바로 81년도에 챔피언이 되었죠. 그리고 이후에 장정구, 김환진 등 많이 나왔어요.

▶ 우리나라가 프로복싱이 가장 왕성했을 때, 세계 챔피언을 3,4개 갖고 있었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인가요?

79년도에서 80년도 사이에요.

▶ 챔피언이 되니까 뭐가 달라지던가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주위에 보시는 분들이 달리 보시니까요. 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데 사실 권투를 좋아하게 된 이유도, 저도 보릿고개 세대이다 보니까 어렸을 때 힘들게 컸어요. 권투를 좋아하게 되면서 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권투에 뛰어들었죠.

저는 직업인데 하루 사이에 챔피언이 되면서 바뀌게 된 모습이 사실은 싫었어요. 주위에서 다르게 보고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저로서는 그런 분위기가 싫었던 거예요. "저 친구가 김태식인데 왜 저렇게 다녀?" "왜 버스를 타지?" 56년생이니까 당시 25살이었고 운동만 하다 보니까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들이 싫더라고요.

▶ 김태식 선수와 박찬희 선수가 맞붙으면 빅 매치라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글자 그대로 프로라는 건 직업이잖아요. 그 당시에 박찬희 선수는 아마추어를 거쳤고 엘리트 코스를 거쳐서 세계챔피언이 됐어요. 저는 그 반대였죠. 무명 선수 생활을 하면서 신인왕이 되면서 챔피언이 된 거거든요. 개인적으로 열등의식을 느끼기도 했죠.

사실은 박찬희 선수와 시합을 벌이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정말 흑백을 가리고 싶어서 파이터 머니도 안 받으려고 했죠. 박찬희 선수와 친해서 사석에서 그런 이야기도 했는데 손해 보는 건 제가 아니라 박찬희 선수에요.

왜냐하면 저는 잡초처럼 무명으로 큰 선수였고 박찬희 선수는 아마추어를 거치고 국가대표를 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나온 선수이기 때문에 붙어보았자 이기면 본전이고 지면 손해거든요. 그러니까 자연히 박찬희 선수는 기피할 수밖에 없죠.

▶ 실제로 대결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박찬희 선수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권투선수마다 상대성이라는 게 있는데 제가 원래 주니어 플라이급인데 일본의 구시켄 요코가 유달리 저하고만 시합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국내 선수들과 시합을 다 했는데 저만 안 해주는 거예요. 세계 권투 선수 중에서 중량을 빼지 않은 선수는 거의 없는데 저만 유일하게 중량을 빼지 않고 시합을 했어요. 한 체급을 올렸기 때문이에요.

48.9g의 시합을 할 선수가 50.8g으로 올리는 바람에 저는 중량을 안 빼고 시합을 하죠. 원래 권투선수가 중량을 4,5kg 정도 최대한 중량을 뽑아서 나와야 컨디션도 유지가 되고 체력이 강해지거든요. 그런데 결국 링 안에서 주먹으로 치고 박고 할 운동이니까 엄청난 체력 소모에요.

중량을 뺀 사람은 평상시 오십 몇 씩 나가는 상태에서 빼야 해요. 쉽게 말해서 그 힘을 그대로 가지고 올라가는 거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구시켄 요코가 시합을 안 오는 바람에 한 체급을 올렸는데 그러다 보니까 박찬희 선수는 중량을 많이 뺀 선수고 저는 안 뺀 경우죠.제가 동양에서 체력이 약하다는 걸 못 느꼈어요. 그런데 서양선수들과 시합을 하면 체력이 열세라는 걸 엄청나게 느낍니다.

이바라 선수가 맞기는 제대로 맞았어요. 그런데 이 선수를 때리면 타이어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처럼 튕겨 나와요. 그만큼 체력이 좋다는 얘기죠. 저는 맞으면 고통이 심하니까 난리가 나요. ◇ 시합 직전에 바뀐 권투 글러브, 뒤바뀐 채점표

▶ 1차 방어전 때 필리핀의 아로넬 아로살 선수와 시합하셨잖아요. 그런데 김태식 선수답지 않다는 평도 있었는데요.

원래는 다른 선수와 시합이 되어 있었어요. 마테볼라라는 선수가 홍콩까지 들어왔다가 우리나라에서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아서 되돌아갔는데 보름 만에 선수 교체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로살 선수와 붙게 된 거죠.아로살 선수는 저와 시합하기 전에 박찬희 선수와 시합을 하면서 큰 경험을 한 사람이에요.

그러면서 저와 시합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굉장히 큰 부상을 당해요. 4R에 턱뼈가 깨지는 사고가 났는데 그 상태에서 15R까지 갔어요. 15R를 마치고 바로 신촌의 한 병원에 입원했는데 저희 때만 해도 헝그리 정신으로 고통을 참고 시합을 했죠. 병원 관계자가 저보고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까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도중에 시합을 그만두면 제 인생이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생각 때문에, 그게 너무 싫어서 눈물을 삼키면서 시합을 한 거예요.

▶ 결국 마테볼라 선수하고도 타이틀 매치를 하셨죠?

80년 12월에 갑자기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LA에서 마테볼라하고 시합을 하죠. 이것 때문에 제가 권투인들한테 굉장히 불만을 사게 되는데 선수도 모르는 글러브 8온스가 나옵니다. 멕시코제 글러브 6온스가 있는가 하면 일제 글러브 6온스가 있어요. 같은 6온스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납니다.

멕시코 글러브 6온스는 거의 80%의 KO율을 갖고 있고 일제 글러브는 한 50% 정도 되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홈 링에서 시합을 하면 대부분 일제 글러브를 낍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국산 글러브를 만들어 내는데 80년도만 해도 국산 글러브를 못 만들어냈어요. 동양은 거의 일제 글러브를 끼고 서양은 멕시칸 글러브를 끼죠. 그러다 보니까 서양 선수들이 KO율이 높은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국내에서도 멕시칸 글러브를 끼고 시합을 했는데 더군다나 외국 선수와 시합을 하는데 왜 일제 글러브를 끼겠어요?미국에 가기 전에 손 부상으로 인해서 매니저와 상의를 했죠. 손이 안 좋으니까 이번 시합은 6온스 일제 글러브를 끼자고요. 흔쾌히 승낙을 했는데 시합 5분전에 갑자기 일제 글러브 8온스로 돌변해서 나왔어요.

하지만 저는 프로선수니까 시합을 해야 해요.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그 시합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8온스 글러브를 끼고 나갔어요. 아직까지 세계 플라이급에서도 멕시칸제 8온스는 가능해도 일제 8온스를 끼는 선수는 없습니다. 그런 시합을 8온스를 끼고 14R까지 왔을 때 이겼다고 생각했어요. 저 혼자 '태식아, 너 돈 벌었어. 3분만 버티면 이긴다.'고 암시까지 하고 시합을 했어요.

그런데 시합 마치고 정확하게 5분이 지나고서야 채점표가 밖에서 올라와요. 링 위에서 마테볼라가 하는 행동을 다 보고 주위의 심판석까지 다 살펴보거든요. 마침 교포 한 분이 심판 뒷자리에 채점표를 훑어보더니 2:1로 이겼다고 사인을 주면서 굉장히 반가워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이 채점표가 5분이 지나도 안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참 계산을 하는 걸 목격했어요. 링 위에서 그게 다 보여요. 계산을 다시 하더니 한참 후에 2:1로 뒤바뀌어서 나오더라고요. 그때 정말 말도 못하게 가슴이 아팠어요.그리고 바로 한국에 나왔는데 안 들어야 될 말을 듣는 바람에 좋지 못한 일까지 생겼어요.

선수도 모르는 권투 글러브가 한 사람에 의해서 가져갔다는 자체가, 선수가 시합을 해야 되는데도 어떤 한 사람이 가방에 8온스 글러브를 가져갔다는 게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 아까 잠깐 돈 이야기를 하셨는데 당시 파이터 머니를 얼마나 받으셨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미국에서 세금을 떼고 나왔을 거예요. 80년 12월에 8,500만원이라는 돈을 받았거든요. 프로라는 게 글자 그대로 상품이잖아요. 같은 선수라도 차이가 있듯이 그런 쪽에서 제가 파이터 머니를 많이 받은 것 같아요.마테볼라와 시합이 잘 되었으면 미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려고 했죠. 결국은 2년 후에 머리를 다쳤는데 애초에 저는 권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4층 높이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거든요. 이미 그때 머리를 다친 충격을 가지고는 운동을 해서는 안 될 상황이었어요. 너무 좋아하던 운동을 하다 보니까 82년 9월에 시합을 하면서 도중에 다시 한 번 머리를 다치죠. 대구에서 10R 시합을 마치고 바로 병원으로 수송이 되면서 3박 4일 만에 깨어났는데 대수술을 받았어요. 어쨌든 지금은 건강합니다.(웃음)

◇ 선수생활 접고 시작한 사업, 사기도 많이 당해

▶ 그 이후부터 김태식 선수의 챔피언 인생이 다르게 바뀌게 된 건가요?

원래 격투기를 하는 운동선수들이 굉장히 단순하지 않으면 아프고 힘든 고통을 견디지 못하거든요. 단순하다 보니까 사회 적응이 안 되는 거고 또 사업에도 재주가 없는 거죠. 제가 82년부터 사업을 많이 했어요. 당구장, 갈비집, 커피숍, 게다가 오퍼상까지 해 봤어요.

저희들이 수입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후원회에서 모아주는 돈이 있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시대를 잘 타고나서 그런지 운이 좋았어요. 재벌 기업에서 후원을 많이 해서 혜택도 많이 봤죠.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 말은 다 믿어요. 사람이 사람 말을 안 믿으면 안 되죠. 그래서 이상하게 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런 사람들은 엄청나게 이야기를 잘 하잖아요. 그러니까 다 진짜로 들리는 거죠.

안 좋은 일을 당하다 보니까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사회에 적응이 더 안 됐고, 제가 영원한 권투인이기 때문에 운동 마치고 바로 체육관을 차려서 후배 양성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은 안 좋은 경험을 다 한 뒤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 그동안 마음고생이 굉장히 심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왜 사회생활이 힘들었는가 하면 머리를 다쳤다고 매스컴에서 많이 떠들었거든요. 김태식이 머리수술을 했는데 병신이 되었다더라, 죽는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 살아났잖아요. 살면서 사람 만나면서 이야기하고 떠들고 웃고 화를 내는 게 당연한데 그런 모습에 따라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거예요.

머리 수술하더니 미쳐서 떠드는 구나, 저렇게 웃는구나, 화를 내는구나...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의술이 많이 발달했겠지만 82년도까지만 해도 머리수술을 했다고 하면 일단 안 좋게 생각했었어요. 머리수술하고 힘들게 살아나니까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할 때 너무 힘들었어요. 나름대로 적응해서 조그만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이상한 사람들이 왔던 거죠.

저도 어리석었던 게 제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남의 얘기에 따라서 했어요. 갈비집도 마찬가지고 당구장은 아는 형이 시작해서 하게 되었고 무역업도 마찬가지고, 제가 좋아서 했던 일은 하나도 없어요. 마지막 체육관은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웃음)

▶ 갈비집은 얼마 만에 문을 닫으신 거예요?

말씀드리기 부끄러운데 정말 나쁜 사람을 만났어요. 명동에 아는 사람이 무역을 하는데 제가 그 사무실에 자주 갔어요. 그 아래층에 굉장히 큰 식당을 하는데 100평정도 되더라고요. 그 식당 사장과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이 된 거죠. 저 정도면 사업을 하면 무조건 된다는 거예요. 나는 경험도 없고 그렇게 큰 돈도 없다고 그랬어요. 지금 돈이 얼마 있느냐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 당시에 1억 하는 가게인데 제가 하면 6천만 원에 주겠다는 거예요. 경험이 없어서 못한다고 거절했어요. 그 집이 뭘 하는 집인가 하면 고기 팔고 백반 파는 집이었는데 제가 밥을 먹으러 가면 점심 때 주방장이 잠을 잘 정도로 손님이 없어요. 그런데 저한테 자꾸 유혹을 하는데 일단 가계약을 하고 2달 동안 장사를 해 본 다음에 안 되면 되돌려주겠대요. 거기에 현혹이 되었고 더군다나 갈비집을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 양반 꼬임에 빠져서 갈비와 설렁탕을 하게 돼요. 제가 몸소 뛰니까 손님이 정말로 많이 왔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지만 제가 못난 탓이에요. 바보스러운 모습을 보이다 보니까 이용을 한 거예요. 한참 영업을 하고 있는데 전 사장이 누구 한 사람을 데리고 왔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서 인사를 시키기에 인사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오후 3시 반 되서 점심 장사를 마치고 직원들과 쉬고 있는데 낮에 왔던 손님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2,3일 후에 저와 인사했던 사람이 들어오면서 "김태식씨, 제가 이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그러는 거예요.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당신, 월급 사장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가계약을 했던 게 실수였는데 내 걸 가져가라고 한 셈이었어요.

당시에 1천만 원을 걸었는데 이후에 2달 동안 장사가 잘 되면 나머지 5천만 원을 주고 가져가라고 했는데 결국 1천만 원의 함정이었어요. 그렇게 1천만 원을 가지고 수리를 하고 저를 앞세워서 오픈을 시켜놓고 장사가 잘 돌아가게끔 해놓고 나서 그 사람은 밖에서 매매영업을 했던 거예요.

◇ 다시 원점으로, 가족에게 늘 고마워

▶ 환멸을 느꼈던 복싱계로 다시 복귀하셨는데 지금 체육관에 몇 명이 있나요?

5,6개월 되어가고 있는데 80명 정도 있습니다. 열심히 가르치고 있고 속된 말로 몸으로 때우고 있어요. 세계챔피언이 하는 체육관은 사범들이 가르치지 직접 가르치는 일은 없어요. 제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입관하면서부터 모든 운동부터 제가 다 관리를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소문을 듣고 관원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고 또 제가 좋아서 하고 있으니까요.

권투계에 문제점이 많아서 그래서 안 들어왔던 거예요. 선수 위주가 아니가 집행부, 매니저 위주라서 권투선수에게 메리트가 없어요. 저도 단순하게 저렇게 하면 돈을 많이 벌겠구나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권투에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들어와서 보니까 노예가 이런 노예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선수와 매니저의 관계는 원수지간처럼 되어버리고 우리 역대 선수들 간에도 매니저와 관계가 좋은 사람은 몇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신진 권투인들과 단합을 하고 대화를 하거든요. 이제는 바뀌어야 해요. 선수 위주의 법으로 바뀌어서 선수 보호차원에서 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집행부로 바뀌어야 합니다.

▶ 옆에서 지켜본 가족들은 고생이 많았겠어요.

처음에는 혼자 많이 돌아다녔어요. 어디를 가도 반겨주니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운동 마치고 놀러 다니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특히 선배들, 남자들의 세계를 좋아하다 보니까 그런 자리를 많이 찾고 또 혼자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고 착각을 한 거죠.그래서 결혼을 37에 했어요.

너무 늦게 결혼하다 보니까 웃기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제가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유달리 딸을 예뻐해서 시간이 나면 딸의 학교에 가서 하교할 때 만나서 데리고 와요. 하루는 딸을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랑 오더라고요. "가희야, 너희 할아버지니?"라고 했을 때 저도 충격이 컸고 우리 딸도 충격을 받았어요. 늦게 자식을 두면 안 된다는 걸 느꼈죠.(웃음)

아내는 김태식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저와 나이차이가 있어서 제가 챔피언 했을 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거든요. 그러니 저를 모를 수밖에 없죠. 아내를 일방적으로 좋아서 좇아다녀서 결혼했는데 저희 같은 성격은 좀 독특해서 알콩달콩 살지를 못 해요.

그런데 아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많이 이해를 해 주고 그런 아내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요. 문제점이 많은 사람을 뒷바라지 해주고 지금도 체육관을 아내가 지키고 있어요. 사범이 없이 하다 보니까 와서 지키고 있고 그만큼 많이 도와줘요.

◇ 나는 영원한 권투인, 좋은 선수발굴이 최우선

▶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영원한 권투인입니다. 권투가 너무 침체가 되어 있다 보니까 권투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권투인들이 제 역할을 못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거라고 보거든요. 제가 뒤늦게 다시 권투계에 뛰어들었는데 정말 좋은 선수, 멋있는 선수를 발굴해서 우리 권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실 수 있도록 빠른 시간 안에 TV나 시합장에서 볼 수 있게 만들겠습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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