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6)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

2007. 8. 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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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깨고 생산적 소통을 향해-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더 이상 문과와 이과의 구별이 공식적으로는 없다. 원칙적으로 학생들은 1학년에 공통 과목을 끝내고 2학년부터는 자신들의 지적 관심사와 졸업 후 진로를 고려해 다양한 선택 과목 중에서 골라 듣게 된다. 그러나 물론 실제적으로는 문과와 이과의 구별은 학생들 사이에서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학교가 다양한 선택 과목 모두를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학생들이 스스로(?) 과거 문과와 이과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선택 과목을 고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학을 싫어한다면 덩달아 과학 심화 과목도 더 듣지 않고 주로 사회과학 과목을 더 듣는 식이다. 이런 현상을 볼 때 형식적 제도의 변화만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문화적 편견을 극복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최근 소개된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사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민사고는 외국 대학 준비반이 따로 있는데 이곳은 외국 대학 입시를 위해 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선택과목을 조합하여 공부한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1학년 때는 별 차이가 없던 학생들이 졸업할 때쯤 되면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교육 받은 학생과 그런 구별없이 교육 받은 학생들 사이에 아주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정말로 문과형, 이과형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동료압력, 문화적 동질화 등을 통해 그런 틀에 박힌 인간형이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렇게 키워지다보니 우리 대학생들은 왜 철학수업 시간에 최근 영장류학의 성과를 소개한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의아해하기 십상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우리와 근연관계에 있는 영장류들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는지 경험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상식적인 생각이 그들에게는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윤리란 도둑질 안 하고 거짓말 안 하면 되는 것이지 자연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과는 철저하게 무관하거나 주변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래 연구해 온 박성래·김영식 등이 '중인 의식'이라고 이름 붙인 이러한 생각이 널리 퍼지다보면, 과학자들은 현대 과학연구는 수많은 사회적 자원과 지원을 필요로 하며 그 파급 효과도 크기 때문에 연구 설계와 진행 과정 모두에서 윤리적 고려가 필수적이라는, 연구 선진국에서는 널리 공유되고 있는 사회적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대체적으로 분류해서 인문사회계열의 지적 배경을 가진 사람과 이공계열의 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한 폐해가 우리나라에서 특히 더 심한 것은 분명하다. 일찍이 과학 배경을 가진 영국의 문필가 스노는 '두 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들 사이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차이가 그들 사이의 생산적인 의사소통을 가로막아 결국에는 영국이 산업부문에서 다른 나라에 뒤처지게 되는 피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스노의 주장은 산업부문에서의 영국의 절대 우위가 경쟁국들의 급속한 성장으로 무너지고 난 이후에 나온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결과에 '두 문화'의 폐해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두 문화' 문제가 유독 심각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폐해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 주제에 대해서는 김용준, 홍성욱 등의 연구가 있다. 실업이나 환경오염과 같은 현대사회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경제학이나 환경공학처럼 그 문제와 직결되어 보이는 한 가지 전문분야의 지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은 여러 측면의 복잡한 쟁점이 얽혀 있는 특징 때문에 이 문제들을 만족스럽게 해결하려면 다양한 분야 전문가의 협력 작업이 필수적이다. 실업은 단순히 일자리와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 사이의 수적 불일치가 아니라 일자리를 잃은 사람의 심리적 박탈감에 대한 고려와 적절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과학기술정책 등과 연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환경문제는 환경오염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일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의 전망에 맞추어 우리 삶의 태도를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최근에 부쩍 관심을 끌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의 경우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으로 논란거리인 원자력 발전이 제시되고 있다. 이 경우 중요한 선택은 단순히 발전단가에 대한 산술적 효율성 계산을 넘어선 국민적 수준의 공감대 도출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라는 개념 자체가 원자력과 같은 과학기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절박한 문제의 해결은 원점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복잡하고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현실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적 배경을 가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궁리할 필요가 있는데 각자의 좁은 전공분야의 시각에 갇힌 전문가들에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종종 이러한 '학제적' 논의는 본질적인 논의에 접근하기도 전에 '윤리적'이나 '합리적' '효율적' 등과 같은 기본적인 개념이 분야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문과형 전문가와 이과형 전문가들의 소모적 논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버리기 일쑤다. 예를 들어 이과형 전문가는 특정 정책이 기술적으로 비용절감을 높일 수 있더라도 사회적 비용을 많이 지불하게 되어 결국에는 사회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문과형 전문가들은 관련 과학기술의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보거나 평가하기 전에 손쉽게 권력이나 이해관계에 근거한 분석에만 호소하기 일쑤다. 최근 중저준위 방폐장 건설을 둘러싼 전문가들 사이의 의견충돌은 이 같은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슷한 상황이 정도는 좀 다르겠지만, 국제적 경쟁에서 문·이과 복합형 인재들을 두루 갖춘 세계 유수의 기업을 상대해야 하는 국내 기업의 기획팀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기업의 생존이 달린 만큼 이 경우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생산적 소통에 대한 요구가 훨씬 더 절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생산적 소통에 대해 우리 지식인들은 어떤 고민을 해왔을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들은 찾아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 분야에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는 학자가 매우 극소수라는 사실이다. 이는 어쩌면 '두 문화'가 뿌리 깊은 우리의 지적 현실에 비추어볼 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이나 기술에 대해 인문학적·사회과학적 분석을 시도한 예는 부지기수이고 역으로 과학기술자가 상당한 수준의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소양을 보여주는 글을 쓴 경우도 꽤 된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이 두 문화를 넘나든 글의 대부분이 현대사회 대부분의 문제 배후에는 과학기술의 기계적 합리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추상적 비판이나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혹은 과학기술의 내용을 일반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글쓴이의 인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지성계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생산적인 대화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와 같은 두 문화 '가볍게' 넘나들기를 뛰어넘는 일이다. 가볍게 넘나들기는 유용하기는 하지만 대화 상대방의 지적 깊이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저술은 수식과 도표가 잔뜩 나오는 본문은 제쳐둔 채 서론과 결론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문학자와 인문학에서 경쟁하는 이론이란 경험적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사람의 개인적 선호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생산적 협동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형태이지만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대중적으로까지 꽤 유행했던 신과학 운동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신과학 운동이 관심을 끌었던 주요 이유는 쿼크 이론과 같은 당시 최신의 물리학 이론에 내재한 원리들이 동양사상의 고전적 저술에 이미 담겨져 있다는 주장의 신선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과학 운동은 두 학문 분야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말았을 뿐, 각자 분야의 고유한 학문적 논점을 진행시키는 데 별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라카토슈식으로 말하자면 적극적 발견법이 부족했던 신과학 운동은 그로 인해 금방 지적 추동력을 잃어갔다.

이와는 달리 최근 유행하고 있는 '통섭'의 움직임은 여러 학문 분야들 사이의 유사한 이론적 구조와 개념적 연관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본격적으로 학문들 사이의 생산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진화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유행시킨 '통섭'은 단순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가 아니라 '정합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진화 심리학자들은 현대 사회과학의 이론들이 가정하는 개인의 인격이나 사회성에 대한 가정들은 오랜 수렵 채집 시절에 인간의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제한조건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걸러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에너지보존법칙에 만족하지 않는 화학법칙이 허용되지 않듯이, 진화심리학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회과학 이론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통섭의 움직임은 학문들 간의 대화를 강조하긴 하지만 많은 경우 그 대화의 성격은 위계적이고 환원적이다. 국내에서 이 논의를 이끌고 있는 최재천은 비환원적 통섭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 추이를 지켜볼 만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생산적 소통에서 깊이 있는 이론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학자가 장회익이다. 그는 온갖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서울 해석이라는 독특한 입장을 제안함으로써 우리 이론의 자생적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후 그는 서울 해석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기반을 확장하여 과학이론 일반에 대한 모형을 제안하였고, 최근에는 그 모형을 보완하고 확장하여 온생명으로 요약되는 생명의 본질과 인간 의식의 문제까지 해명하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장회익이 과학자의 시각에서 인문학적 주제들을 통합하여 연구하고 있다면, 송상용 등의 과학기술학자들은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자연과학의 주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 양방향에서의 생산적 소통의 노력이 좀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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