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컬트여행지](28)인도'스리나가르'서 '레'까지

2007. 8. 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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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분쟁 지역이라지만 히말라야가 비치는 달 호수에서 보낸 여름 한철은 나도 모르는 꿈속의 꿈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출발해 라다크 왕국의 수도인 레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가히 세상 끝 경계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천로역정의 길이라 할 만하다. 이 길은 세상의 아름다운 길 중에서도 우뚝 솟는다.

한여름이지만 진눈깨비가 내렸다. 날은 몹시 추워서 배낭 깊숙이 박아 둔 겨울 점퍼를 꺼내 입고도 그 위로 또 모포를 두르고 있어야 했다. 며칠 전에 이 길을 떠난 어느 버스는 폭격을 받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지만, 왔던 길을 다시 되밟아 돌아가지 않는 한 이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이곳은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활동하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이다. 버스가 출발하고 한동안은 자작나무 숲 그늘과 소박한 인가들이 이어졌다. 한적한 전원풍경에 나는 잠시 졸았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미 생활의 풍경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차창 밖으로 백색의 설산들이 침엽수림 너머로 우람하게 솟아있었다. 알프스 산악풍경보다 한 수 위라는 소나마르그에 버스가 잠시 멈췄다. 버스 기사는 차 위로 올라가 줄을 바투 당겨서 승객들의 짐들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그 틈에 차 위로 올라가 가방에서 털모자며 옷가지들을 꺼내 내려왔다. 모두들 하얀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길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이정표나 표지판도 필요 없어 보였다. 길은 단 하나 외길이고, 그 길은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쳐 설산의 능선들을 이리저리 휘돌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높이 솟아 있고, 커다란 매 한 마리가 그 사이 허공에 길을 내며 앞서 날고 있었지만 길은 그저 묵묵히 제 진도가 따로 있다는 듯이 덜컹거리면서 아주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버스가 지나가면 여기저기서 낙석들이 굴러 떨어져 내렸다. 나는 자꾸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버스 바퀴가 절벽 아래로 걸쳐지는 건 아닌지 확인하곤 했다. 이 길은 평소에는 눈과 빙하에 덮여 있다가 여름 한철만 열린다. 거대한 설산 사이로는 빙하 녹은 물이 폭포로 쏟아지고 수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는 우윳빛 계곡물이 굽이친다. 푸른 침엽수림 아래 펼쳐진 초원에는 여름 한철 잠시 화사하게 피고 지는 들꽃들이 여기저기 색색으로 흩어져 있다. 풍광은 무서움증이 일 만큼 아름답다.

인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창밖으로 가끔씩 총을 걸쳐 멘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털모자를 얼굴까지 다 내려 써서 눈동자만 보인다. 그들이 입고 있는 낡은 군복은 후줄근했고 군화 대신 맨발에 신고 있는 그들의 국방색 운동화는 곧 해질 듯하다. 게릴라도 아니고 정식 군인들이라지만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성글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의 풍경이다. 버스는 자주 검문소에 멈춰 섰다. 아마 스무 번 가까이 검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여권번호와 비자번호 그리고 그것들의 발행일과 유효기간을 커다란 장부에 매번 적어 넣어야 했다. 검문소의 군인들은 여권 속의 내 사진과 긴 여행으로 까맣게 타고 해쓱해진 내 얼굴을 몇번씩 번갈아 쳐다보곤 했다. 그때마다 나도 내 존재를 증명하는 허술한 숫자들과 사진 속의 내 얼굴을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해가 지자 버스는 1박을 위해 까르길이라는 작은 마을에 멈춰 섰다. 이곳은 외신 보도에도 자주 등장하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의 활동 지역이다. 언제 또 어디선가 폭탄이 터질지도 모르지만 그걸 생각하기에 하루 온종일의 버스 여행이 꽤 고단했다. 승객들은 몇 시간의 잠과 식사를 위해 근처 식당과 허름한 여관들로 흩어졌다. 작은 마을은 가로등도 없이 깜깜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 급사는 뜨거운 물이 담긴 양동이 하나를 들고 왔다. 온수로 얼굴을 씻고 그 물로 발을 씻었다. 비누를 듬뿍 칠해서 발가락 하나하나를 아주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래도 긴 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침대 대신 의자에 기대어 앉아 '파리텍사스' OST를 CD플레이어에 넣고 눈을 감는다.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고, 본 적 없는 드넓은 황야가 귓가에서 머릿속으로, 그리고 가슴속으로 펼쳐진다. 그곳에는 예언의 목소리도, 계시도, 기다림도 없이 존재의 무게를 잃은 침묵만이 그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물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생활의 냄새도 없다. 작별만이 인생이고 그것이 오히려 편안함을 안겨준다.

새벽 4시가 되고, 어제의 승객들이 다시금 버스에 올라탔다. 길은 여전히 외길이었지만, 풍광은 점차 푸른 기운 하나 없는 사막지대로 변해가고 있었다. 버스가 잠시 멈추면 사내들은 다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어디론가 향했다. 그들을 따라 가보면 천막으로 대충 만들어진 작은 짜이집이 나오곤 했다. 낯선 사내들 틈에 섞여 담뱃불을 당기고, 작은 유리잔 가득 담겨 나오는 뜨거운 짜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그곳에서는 연한 계피향이 났다. 이틀을 함께 했다고 좀더 다정한 눈빛을 지어 보이는 이들 곁에서 비록 작고, 바짝 마른 빵이지만 그것을 짜이에 담가 먹다보면 속이 훈훈해졌다. 창밖으로는 점차 티베트 양식의 가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레에 가까이 왔는가 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생김새도 점점 우리를 닮은 얼굴로 바뀌어 간다. 나는 마치 짧은 세계 유람이라도 마치고 귀국길에 접어든 여행자 같다. 이틀 간의 이 외길도 이제 거의 끝이 나나 보다. 길 위에는 다시 이정표들과 표지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갈림길들이 나타나고 여기저기 아이들과 염소들, 유채꽃밭, 밭가는 사람들이 이제 막 세상 밖 풍경을 지나 온 여행자에게 다시금 생활의 감각을 일깨운다.

구름 높은 라다크 왕국의 푸른 하늘에는 간만에 살아 있음의 햇살이 참말 눈부시다.

▲ 길잡이

◇여행시기=연중 6~9월 육로 여행이 가능하지만 정해진 것은 없고 날씨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특히 레에서 마날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그보다 좀더 일찍 닫히기도 한다. 비행기를 타거나 다음해까지 그곳에서 보내지 않을 생각이라면 9월 중순에는 여행을 마치는 게 좋다.

◇교통수단=지프나 공영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지프 대절이 비싼 이유는 운전사들의 곡예 운전 스턴트 관람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 듯싶다. 로켓이나 폭탄이 날아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공영 버스의 안전성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공영 버스는 오랜 도제과정을 거쳐 양성된 믿을 만한 운전자들이 운전한다. 버스는 한 줄에 3명이 타는 딱딱한 좌석의 세미디럭스가 있고, 한 줄에 2명이 앉는 푹신한 좌석의 디럭스가 있다. '울트라 마조히스틱 트래블러'들은 트럭을 히치하기도 한다.

◇스리나가르에서 레 방면으로 갈 때는 오른쪽 창가에 앉아야 훨씬 좋은 풍광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출발하자마자 이내 오금이 저려 당장 자리 바꿔 줄 사람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여행의 종착역인 레는 '은둔의 왕국' 라다크의 주도다. 라다크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의 무대. 스리나가르에서 레까지의 1박2일은 라다크로 가는 유일한 육로다.

〈글·사진 유성용|여행생활자 www.maengm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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