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요에 젊은이도 외국인도 어깨춤 덩실덩실~"

2007. 7. 2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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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칠한 키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눈빛. 맑고 청아한 목소리. 스스로를 소리꾼이라 부르는, 젊은 소리꾼 김용우.

일반인에게는 어렵기만 하고, 따라 하기도 힘든 민요… 하지만 정말 좋은 그 민요를 나만 알고 있는 게 너무 아까워서, 쉽게 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소리를 시작했습니다.

민요와 록, 재즈와의 만남을 거침없이 해내는 국악 크로스오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하염없이 불타는 저녁노을처럼 우리 음악에 푹 젖을 줄 알고 젖기 위해서라도 살아가는 자리를 훌훌 떠날 줄 알고 그래서, 이 땅 저 땅을 고통으로 밟으며 옛 삶의 소리를 목말라하는, 목마른 만큼이나 우리시대를 온 몸으로 몸부림치는 사람, 바로 가인(歌人) 김용우라고 목원대 한국음악과 노동은 교수는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 국악계의 이단아 소리를 들었던 사람, 전통을 복원하고 현대화 하는데 온 정성을 쏟는 젊은 소리꾼 김용우 씨를 7월 23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젊은 소리꾼, 민요로 세계를 노크하다

▶ 젊은 소리꾼이라고 소개를 해드렸는데, 젊다는 말을 빼야 하는 게 아닌가 약간 고민했어요.(웃음)

초창기의 젊음은 그야말로 '나이가 젊어서' 젊은 소리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저도 나이를 먹으니까 '음악이 젊다'는 그런 식으로 살짝 스스로 바꿨습니다. (웃음)

▶ 1968년생… 젊음의 비결이 노래 때문인가요?

특히나 좋아서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고, 또 젊게 봐주시니까 그런 것 같아요.

▶ '소리꾼'이라는 말을 듣는 걸 좋아하시죠?

소리꾼이라는 말을 좋아하죠! 처음에는 딱히 뭐라고 할 지 몰랐어요. 96년도에 음반을 처음으로 내고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국악가수, 민요가수, 이런 식으로 앞에 접두사처럼 붙는 거예요. 민요가수 하면 일반적으로 김세레나 씨, 김부자 씨 등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게 앞에 붙는 애칭은 별로인 것 같고… 그래서 소리꾼이라고 스스로 붙인 겁니다.

▶ 공연을 많이 하시는데 최근에 어떤 공연을 하셨죠?

작년에 '올해의 예술상'을 받으면서 예술축제라는 곳에서 공연을 했어요. 예술상을 받은 사람들한테 전국, 특히 서울을 제외한 중소도시를 돌면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찾아가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 그것 때문에 홍성, 안동에 가서 공연했죠. 호평도 받고 재미있게 공연을 마무리했던 게 5월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베트남 공연이 있어서 베트남에도 잠깐 다녀왔어요.

▶ 베트남 같은 경우는 우리 소리를 어떻게 듣습니까?

저는 '우리 소리'도 많이 부르지만 때에 따라서는 다른 나라의 민요도 부르는 편이예요. 일본에 가서 2000년도에 공연할 때 일본민요를 많이 불렀어요. 그러다가 2004년도 정동극장에서 하는 공연 때 '김용우와 함께 떠나는 월드뮤직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하면서 일본민요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민요도 한번 해보는 생각에, 처음으로 베트남민요도 스스로 찾아내서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공부한 걸 이번에 베트남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부르게 됐어요.우리의 트로트 같은 느낌도 있는데 약간 템포가 빨라요. 가사가 입에 익지 않아서 가사를 외우는 게 무척 힘들었는데, 그때 정동극장에서 할 때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사실 반주가 준비가 되었던 게 아니에요. 즉석에서 사회자가 '혹시 베트남민요를 아는 게 있냐'고 해서 노래를 했는데 완전히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그 동안 연주는 여러 번 했었지만 노래로 직접 다가간 케이스는 별로 없었다고 해요.그래서 이제는 외국에 나가서 단순히 우리나라 음악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죠. 문화교류를 하는 거죠. 서로 쉽게 다가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우리의 것을 알리는 데도 최고로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베트남은 한류의 바람이 엄청나기 때문에 한국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반응을 보였거든요. 거기다가 베트남민요까지 했으니 반응이 상당히 좋아서 앞으로 기회가 되면 다른 동남아 지역에도 가서 공연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미국에도 공연을 가신다고요?

9월에 있을 예정이어서 준비를 하고 있어요. LA공연은 이미 잡혀있는데 그것과 연결해서, 추석 때는 뉴욕에서 개인공연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무리하게 진행을 하고 있는 중인데 여러 가지 여건이 어려워요. 경제적인 부분이 제일 어려워요. 후원해 주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너무 미미해요. 그 동안 했던 공연도 거의 제가 기획도 하면서 공연했던 부분들이 많아서, 이번 미국 공연만큼은 음악에만 치중해서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것마저도 쉽지가 않더라고요.그래서 만약 9월에 그게 안 되면 내년에라도 진행을 시켜서 어떻게든 우리 민요를 맨하튼에서 꼭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민요의 세계화 측면에서, 우리 소리를 해외에 소개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대통령이 해외를 갈 때 우리 문화를 가지고 간다든지…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대통령이 민요가수인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ália da Piedade Rebord o Rodrigues)'라는 가수와 동행하는데 저도 그 가수를 좋아해요. 대통령 해외 순방 때 전통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면, 말이 몇 마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 '민요는 삶' 10년을 하루같이 십년지기(十年知己)

▶ 주로 민요를 부르시는데 민요의 '맛'과 '멋'은 무엇인가요?

저는 '민요는 삶'이라고 규정을 해요. 예전에는 삶 속에서 불렸던 노래가 민요니까요. 일과 뗄 수 없는 게 민요이고, 일을 하면서 힘들거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부른 게 민요잖아요.그런데 최근에는 농사짓는 게 기계로 바뀌면서 민요가 다 사라져버렸거든요. 사실 제가 채집을 다녔던 시기가 기계가 들어와서 완전히 농촌을 초토화되기 바로 전 단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소리채집을 할 수 있었고, 물론 그 시점에서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방송사에서도 이것의 소중함을 알고 하신 분들도 많이 계신데, 그분들이 자료를 남기기 위해서 작업을 하신 거라면 저는 그 노래를 직접 불러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소리채집을 다닌 것이기 때문에 시작부터 달랐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 자료를 많이 갖고 계신가요?

예, 많이 갖고 있고 96년부터 음반을 만들기 시작해서 1,2개씩 뽑아서 음반에 담고 있어요. 토속 민요를 가지고 음반을 내려고 하거든요.

▶ 음반이 5개 나와 있어요?

정규앨범으로는 5장이고 일본에서 싱글 앨범을 하나 냈습니다. 작년에 만 10년이 돼서 「십년지기」라고 베스트 앨범을 냈어요.

▶ 젊은 사람들이 민요를 안 듣는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아무래도 자주 접할 수 없다는 것이고 실제로 제가 봐도 TV에서 우리 음악이나 민요가 나오면 채널을 돌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음악이라는 것은 직접 가서 봐야 하는 거거든요. 극장에 가서 보고 찌릿하게 오는 전율을 무대의 소리꾼과 관객이 함께 느꼈을 때, 뭔가 일체감과 함께 민요라는 것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방송을 통해서 하면 한 번 걸러지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그리고 구태여 한이 서려있다기보다 하면 할수록 저도 어려워요. 쉽지 않으니까 금방 따라서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좀 쉬워야 대중가요처럼 한번 들으면 자연스럽게 흥얼거리다가 노래방에 가서도 불러보고 이렇게 돼야 이게 내 노래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사실 제가 도전한 것도 쉽게 부를 수 있는 민요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건데, 이 민요도 아직은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 전통의 현대화는 입는 옷이 다를 뿐

▶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계시잖아요. 아카펠라 형식으로 부른 것도 있고 재즈 스타일로 편곡도 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다가간 부분이 많아요. 슬기둥도 젊은 사람들한테 이런 민요를 쉽게 알리기 위해서 만든 건가요?

슬기둥은 제가 만든 것은 아니고 85년도에 저희 선배님들이 만들었고, 제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92년도에 들어가서 중간부터 활동을 해서 99년까지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그건 그야말로 국악가요라는 장르이기 때문에 쉽게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게 교과서에 실렸거든요. '산도깨비', '소금장수' 등은 교과서에 실리면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국악도 이렇게 쉽게 만들면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하지만 이건 민요이다 보니까 아무리 민요를 쉽게 부른다고 해도 꾸밈음을 우리말로 시김새라고 하는데 이걸 다 덜어내자니 맛이 안 나고 그렇다고 다 넣어서 부르자니 너무 어려워요. 그리고 제가 하는 작업이 아카펠라나 재즈 같은 작업과 함께 할 때, 제 욕심만으로 그 음악과 어울렸을 때는 물과 기름처럼 어우러지지 않거든요.제 것을 덜어내고 그쪽 것을 덜어냈을 때 어차피 음악은 하나로서 들려지는 거니까 그런 작업을 오랫동안 하면서 쉬운 일은 아니구나, 이 작업을 10년을 넘게 해오고 있지만 과연 어느 시점에서 덜어내야 하고 어느 부분에서 욕심을 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직도 답답하고 힘들 때가 많이 있어요.

▶ 전통의 현대화 작업을 하다가 전통 그대로 노래하시는 분들한테 '이게 뭐야' 하는 소리는 안 들으셨어요?

초창기 1집 음반을 냈을 때만 해도 좋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희 선생님들은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 타이틀이 '또 다른 소리꾼' 말고 '무형문화제 12가사 이수자'거든요. 정가, 가곡, 가사, 시조를 부르던 녀석이 민요를 부르니까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답답해하시죠.하지만 제가 그 노래를 전혀 안 했던 것은 아니고 지금도 하거든요. 지금도 하루에 1,2시간을 연습할 때 목을 열기 위해 소리가 바로 정가에요. 시조, 가사, 가곡으로 안정을 시킨 다음에 경기 잡가와 서도 잡가를 부르고 민요로 들어가서 무대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합니다. 그만큼 저한테 기본이 되는 노래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늘 하지만, 무대에서 불리는 것들이 민요다 보니까 선생님들이 많이 아쉬워하셨어요.

▶ 이수자가 그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야단을 맞거나 평단에서 혹평을 받지는 않으셨어요?

그런 얘기들은 많이 하셨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하는 음악도 정말 중요한 부분이고, 선생님들도 몇 십 년 동안 갈고 닦은 음악이 중요한 것만큼 제가 하는 음악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렸고 이해를 해주셨어요. 공연 때 모셔서 보게 해 드리면 네가 하는 음악도 필요하겠구나 하는 말씀도 하셨어요. 제가 전통을 무시하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가되 거기에 입히는 옷이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캐주얼을 입었다, 양복을 입었다, 또 힙합을 입었다, 재즈를 입었다, 아카펠라를 입었다, 이렇게 전통 위에 입는 옷을 달리했다고 이해를 하시면 선생님들 입장에서도 죽일 놈, 살릴 놈까지는 안 하시겠죠.(웃음)

◇ 소리 좋다는 말 듣고 무작정 찾아간 「지게소리」

▶ 첫 앨범의 「지게소리」는 고성규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다는데 그 분은 어떤 분이세요?

충남 태안 분이신데 정말로 이름 석자만 듣고 태안에 갔어요. 그 곳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지역마다 전화번호부라는 게 있잖아요. 그분이 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화번호부에서 고성규라는 이름을 찾았어요. 태안지방에만 세 분 계시더군요..일일이 다 전화해서 지게소리를 부르시는 분이냐고 여쭤봤는데 두 분은 아니고 한 분이 본인이라고 하셔서 찾아갔어요. 이 분은 그 지역의 토속민요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시조 선생님으로 유명하셔서 각 지역별 시조들도 가르치시고 그렇게 소일거리 하시면서 지내셨어요.

▶ 그분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소리를 배우셨나요?

그냥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부르는 소리 듣고 따라 부르신 거죠.지게소리는 보통 산에 올라가서 나무목발을 두드리면서 신세한탄을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서 동구 밖쯤 들어왔을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어디쯤 왔으니 밥 준비하라는, 가장이 들어가니까 준비하라는 신호인 거예요.

▶ 고성규 할아버지가 김용우 씨가 부르는 걸 보고 왜 내 노래를 그렇게 불렀냐고 야단을 치셨다면서요?(웃음)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로 편곡을 했는데 그때는 좀 호탕하게 불렀어요. 이렇게 해서 악기가 들어오니까 그러셨죠. 사실 제일 첫 번째 앨범이고 첫 번째 음악이었는데 그렇게 음반을 내고 선생님께서 호통치셔서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안 건드립니다.다른 어떤 노래를 가지고 만들 때도 선생님의 노래를, 제 방식대로 부르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 음정을 바꾼다거나 이런 짓거리는 안 합니다.(웃음)양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양악기가 같이 어우러지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고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을 이해하고 들어주시면 이것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고, 선생님 노래에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얹어서 부를 수는 없거든요. 음정 등을 많이 편안하게 부르시기 때문에 두 가지 다 가치 있다고 평가해 주시면 좋겠어요.

▶ 국악인들은 목소리가 걸쭉하신데 김용우 씨는 맑은 미성이라 민요를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나요?

아니요, 처음에는 제가 목소리가 이래서 민요를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했었어요. 판소리는 정말 허스키하게 부르는 소리고 경기민요나 서동요 소리는 아주 카랑카랑하게 목소리를 내서 부르는데 저는 정가라는 노래로 처음 목소리를 다듬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미성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정가를 하신 같은 동료나 선배님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저랑 비슷합니다. 목소리가 미성이고 곱게 노래를 부르는데 단지 저는 그런 노래를 부르다가 민요를 부르게 되면서 그 목소리를 그대로 민요로 가지고 가게 된 거죠.이게 남들이 들었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 처음에는 의구심도 가졌는데 제가 음반을 녹음하고 서양악기들과 함께 하면서 제 목소리 자체가 서양악기와 어우러지는 게 훨씬 더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단 튀지 않고 제 목소리 안에서 충분히 시김새 같은 것들이 표현이 되기 때문에, 미성이라서 표현이 안 되거나 어려웠던 적은 없었어요.제 노래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오히려 미성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분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 민요 부르고 북치고...그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어

▶ 목소리를 관리하는 방법이 있나요?

따로 관리는 없고 자기 전에 가글하는 게 너무 오래됐어요. 그냥 맹물로 목젖 안에까지 집어넣어서 5,6번 하고 잡니다. 그래야 안에 있는 나쁜 것들이 다 빠져 나오거든요. 그렇게 하고 잠자면 다음날 목소리가 괜찮아요. 그리고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데,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부르면 그 다음날 완전히 목이 쉬거든요. 그래서 공연 없을 때만 마시고. 친구들 만나면 손장난 치면서 민요 부르고 북이 있으면 북 치고, 저희 팬카페 분들 만나면 그분들 앞에서 장구, 북 하나 가지고 노래 부르고, 그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어요.우리 국악을 진정 느끼시려면 국악을 하는 친구를 만드셔서 그분들과 술자리를 가든지 했을 때 직접 옆에서 들으시면 싫어하고 싶어도 싫어할 수가 없어요.바로 옆에서 듣는 우리 소리, 그럼 바로 마니아가 됩니다.

▶ 저희가 소리꾼을 모셨으니까 민요를 하나 소개해 주세요.

제주민요가 일반적으로 들었을 때도 편하고 쉽게 들을 수 있거든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다르게 편곡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주민요 '너영나영'을 소개해 드릴게요.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저녁에 우는 새는 님 그리워 운다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고요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쌍사랑이로구나

청청한 하늘엔 잔별도 많고요이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고요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쌍사랑이로구나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쓰러진 정자나무 더 쓰러진다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고요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쌍사랑이로구나

우리가 살면은 몇만년 사나아무리 잘 살아도 단 팔십이다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고요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쌍사랑이로구나

▶ 저 어릴 때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노래인데, 이게 제주민요였군요.

학교 다닐 때 제주도를 다닐 수 있는 여건은 안 되잖아요. 돈을 어떻게 좀 모아서 제주도를 가게 되면 '너영나영' 같은 이미 알고 있는 노래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민요를 많이 발굴했어요. '용천검', '아외기소리', '서우제소리' 등 일하면서 불렀던 노래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제주민요가 정말 멋있구나 하는 기회를 만들어드린 것 같아요.

◇ 십년지음(十年知音), 처음으로 매진기록

▶ 김용우 씨가 젊은 층에게 다가가니까, 국악계에서는 드물게도 펜클럽이 있다면서요.

회원수는 3,700명 정도 되요. 공연이나 콘서트를 하게 되면 그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작년에 10주년이 되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매진이라는 것을 해봤는데 그래서 바로 이게 첫술에 배 부르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10년을 하고 나니까 비로소 '민요를 한다더니 10년 동안 했네, 한 번 보러 가 볼까?' 이런 마음에서 오신 것 같은데 그때 공연을 하고 나서 공연을 앞으로 많이 해야겠구나, 어깨도 많이 무겁다는 생각을 했어요.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져 주니까 보여줄 것도 많아야 하고 들려줄 것도 많아야 하잖아요.

▶ 반응이 가장 좋았던 음반이 4집인데 제목이 「질꼬냉이」에요. 무슨 뜻인가요?

4집 앨범인데, 진도에서는 옛날 양반집에서 머슴들을 부릴 때 머슴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눠줍니다. 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수확을 할 때 거기서 가장 많은 수확을 한 머슴에게 주인이 상을 주는 거예요. 소를 한 마리 주면 그 소를 타고서 주인장 집으로 들어오면서 부르던 노래가 질꼬냉이에요. 장원을 했다고 해서, 장원질 소리라고도 합니다.그 앨범이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 안에 제주민요 용천검이 들어있어서 많은 분들이 좋아했어요.

▶ 질꼬냉이가 인터넷음반 쇼핑몰에서 3위를 했어요. 1위부터 서태지, 신승훈, 그리고 김용우. 굉장한 거 아니에요?

그런 얘기를 한 번 들은 것 같아요. 예전에 그랬나요?(웃음) 얼핏 들은 이야기는 있는데 별로 거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방송 영향이 있어서, 그것을 주제로 해서 다큐멘터리를 찍은 게 있는데 방송이 정말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 12가사 전수받으며 자연스럽게 민초의 소리로 이어져

▶ 학교 때부터 노래를 하셨어요?

아닙니다. 원래를 피리라는 악기를 했어요. 고향이 충북 영동인데 중학교 1학년 때 피리를 접했어요.초등학교 때는 음악 하는 게 좋아서 합창반도 들어가고 밴드에도 들어가서 리듬악기도 치다가 중학교를 갔는데 중학교에는 음악반이 없는 거예요. 보니까 국악을 하는 게 유일하게 하나 있었어요. 그래서 저걸 한 번 들어가 보자 했더니 선배들이 몇 사람 있는데 너무 열악한 거예요.사실은 국악도 몰랐고 가야금 있는 게 줄도 다 끊어지고 피리도 얼마나 선배들이 오랫동안 불었는지 리드가 안이 다 썩었어요. 그런 걸 잘라내고 또 깎아서 불고 했는데 그때 인연이 된 거죠. 선생님께서 계시긴 했지만 주로 가야금을 하셔서 선배들한테 배웠어요.그래서 본격적으로 피리 공부를 국악고등학교를 들어가서 하게 되었어요. 대학교 끝까지 해서 졸업하고, 졸업연주 후에 피리는 손을 놨어요.

▶ 어떻게 민요까지 가게 된 거예요?

피리를 불었던 시절에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노래를 주로 부르게 되잖아요. 그때만 해도 어디서 주워들은 노래인데 그런 노래들을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반응이 장난이 아니거든요.(웃음)대학을 다닐 때 12가사를 전수받으면서 노래와 자연스럽게 인연이 된 거거든요. 전공은 피리를 했지만 1학년 때 12가사라는 노래도 부르고 동시에 진행을 하다가 졸업하면서 내 갈 길이 무엇인가 힘들어할 때 민요가 다가왔어요. 또 소리는 선생님한테 제대로 배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민초들이 불렀던 소리들도 채집을 다녔는데 그게 뭘 끝나고 시작한 게 아니라, 노래도 부르고 피리도 부르고 대학교 때 농촌활동 가서 들었던 민요가 좋아서 소리채집도 다니고 실내악단도 하고 그런 게 다 대학교 때 이루어졌어요.

▶ 슬기둥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인연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그렇게 인연이 되었던 게 졸업을 하고 바로 선배님들이 와서 한 번 같이 활동을 해보자 해서 그때 처음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봤어요. 슬기둥 시절에, 그게 인연인 거죠.

▶ 무대에서 피리 안 부르고 노래 부르니까 기분이 좋으셨어요?

사실 그냥 친구들 앞에서 부를 때는 너무 편하고 세상이 너무 좋잖아요.(웃음) 그런데 소위 말해서 밥벌이가 되니까 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이거 이상하다, 왜 이러지? 정말 노래를 하면서 별의별 일이 많은데 목에 좋게 하려고 소금물로 가글을 여러 번 했어요.그런데 그렇게 하고 올라갔는데 노래가 안 나오더라고요. 목소리가 꽉 막혔어요.정말 죽고 싶은 거죠.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은데 빨리 내려갈 수는 없고 그때 무대에서 나와서 처음으로 울어봤어요. 숨어서 엉엉 울었어요. 목소리가 안 나와서 울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어서 노래한다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죠.그래서 세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노래지만 잘 하기 힘든 것도 노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부터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 고봉에 담아준 인심, 소화제는 필수

▶ 민요채집 하러 많이 다니셨어요?

전국여행을 많이 했어요. 그때 에피소드가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위가 작아서 그런지 먹는 것이 제일 힘들었어요. 먹는 걸 좋아하는데 많이 못 먹어요. 그래서 가장 힘들었던 게 밥 먹는 건데,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선생님을 찾아왔다, 소리가 듣고 싶다고 하면 아침에 출발해도 해걸음 정도 되니까 그때 되면 밥을 주세요. 알아서 밥 먹고 이따가 보자 이러시는 분은 없어요.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시죠.그러면 밥을 고봉이라고 해서 이따마한 그릇에 주시는데 그걸 먹어야 소리를 해 주시는 거예요. 제 생각에도 밥을 주셨는데 남겼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미워서 안 해줄 거예요.또 깨작깨작 젓가락으로 먹으면 서울에서 온 놈들은 다 이렇다고 안 해주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꾀가 난 게 그 다음부터는 소화제를 갖고 다녀요. 나름대로 그 순간을 넘길 수 있는 건 술을 마시니까 남자 어르신들을 만났을 때는 술을 한 순배 나누다 보면 천천히 먹잖아요. 거기서 소화제는 더 이상 안 먹었습니다.

▶ 만나본 선생님들 중에서 정말 굉장히 무서웠던 분은 안 계셨어요?

그런 분은 안 계셨던 것 같아요. 제가 어르신들 대면을 잘 하나 봐요. 빈손으로 가지는 않았고 항상 돼지고기 한 근에 막걸리 한 통을 갖고 갔어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어딜 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한국인의 정서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렇게 흥을 내고 소리를 듣고. 그러다 보면 밤새는 것도 모릅니다. 살던 얘기도 듣고, 얘기하시다가 엉엉 우는 분들도 계세요. 듣다가 저도 따라 울고...제가 이런 소리를 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진도에 사시는 조공례 선생님이신데 97년에 작고하셨어요. 남편이 소리를 못하게 하려고 돌멩이로 입을 찍고, 남편 봉양 안하고 소리하러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요. 그런 얘기 하시면서 철철 우시고 저도 울고.소리라고 하는 게 그런 한과 삶이 들어있지 않고서는 그런 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 분은 소리하는 게 업이었거든요. 물론 농사도 지으셨지만 시골에서 사시면서 업으로 노래도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분이 하는 소리는 상여소리, 누가 돌아가시면 상여소리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남편 밥 안 해주고 소리하러 다녔다고 구박하니까 더 이상 소리를 못하는 거죠. 그런 삶들이 자연스럽게 목소리로 표현이 될 때 그렇게 소리가 나오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소리를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그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데, 바로 옆의 친구가 죽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제가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겠어요.

▶ 부모님은 소리하고 피리 부는 걸 좋아하셨어요?

처음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좋아하세요. 고향이 박연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이기 때문에 해마다 공연이 있어요. 작년에 김용우 콘서트를 영동군에서 해주셨는데 너무 내 아들이라고 자랑하셔서 쑥스럽기는 했는데, 어쨌든 공연하면서 뿌듯했죠. 저도 고향을 잊고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요.

◇ 전 세대를 아우르는 민요가 '월드 뮤직'

▶ 민요를 '월드 뮤직화'하는 거창한 꿈이 있으신데 그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하시는 일이 있으신가요?

토속민요를 세상에 알리고 이런 노래가 있다는 것을 10년 전부터 작업을 해서 음반을 통해서 많이 알렸는데, 월드 뮤직이라고 해서 그쪽의 소리들을 우리 것으로 가져와서 녹여서 하는 것을 월드 뮤직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토속민요를 통해서 발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의 관심분야는 전문소리꾼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알려서, 이런 노래들을 어렵기는 해도 함께 불렀으면 좋겠어요. 파도(Fado) 역시 따라 부르기 굉장히 어렵거든요. 포르투갈 사람들도 어려워해요. 그렇듯이 창부타령이 있다고 치면 이런 노래도 제가 불러서 사람들과 세계에 널리 알렸으면 좋겠어요. 전문소리꾼들에 의해서 불렸던 노래들을 이제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소리꾼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만 듣고 어깨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젊은 친구들도 듣고 참 재미있게 같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녹아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씩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런 작업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라도 많은 노력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왜 이렇게 어려운지, 매일 1,2시간씩 연습을 하는데 연습하다가 막히고 또 연습하다가 막히고...어느 날은 너무 화가 나서 일주일 동안 술을 안 먹고 참고 연습을 했는데 안 되는 거예요. 에이, 모르겠다. 술이나 먹고 불러보자. 그래서 밤 12시에 술을 먹었어요.새벽 4시까지 마시고 노래를 했는데 감정은 돼요.(웃음)2,30대는 그야말로 노래를 따라서 흥얼흥얼거릴 수 있는데 그게 제 마음 속에 다가오기 위해서는 가사도 들어와야 하고 감정도 들어와야 하는데 제가 욕심꾸러기라는 생각도 들어요.하루아침에 안 되는데 좀더 완벽하게 얻지는 못해도 빨리 얻고 싶은 거죠.어르신들 말씀도 관에 들어갈 때까지 득음은 없다, 저도 그런 생각은 하거든요. 이게 철저하게 저와의 싸움인데 이 싸움에서 혹여 질까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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