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그들만의 언어.."BP 체크하고 Emergency CBC 내"

2007. 6. 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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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

'중국 93%, 일본 11%, 한국 0%'. 한·중·일 3국의 흉부외과 의사들이 쓰는 의학용어 중 자국어가 차지하는 비율을 조사한 결과다.

이번 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의사들은 유난히 우리말보다 '그들만의 언어'를 즐겨 쓴다.

환자나 보호자들은 증상이나 처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도 영어와 라틴어, 한자, 일본식 표현이 뒤섞인 의사들의 말만 들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특히 진료·처방·간호 등 모든 단계에서 외국어로 된 난해한 의학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환자들이 의사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이로 인해 의사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

물론 의사들의 이같은 우리말 경시풍조는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대학 6년, 인턴·레지던트 6년 등 12년간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다.

'의학용어 큰사전'의 저자인 지제근 서울대 명예교수는 "의대 강의실은 영어교과서, 이른바 원서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고 강의도 주로 전문용어는 모두 영어로 쓰고 있다"면서 "그 결과 이제는 학생들이 우리말의 의학용어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말로만 시험문제를 내면 단어의 뜻을 몰라서 영어로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정도"라고 우려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BP를 check하고 Emergency CBC를 내고 ward로 옮깁시다."

무슨 뜻일까?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이 말은 "혈압을 재고 응급혈액검사 후 병실로 옮깁시다"란 의미다.

문제는 이처럼 동료 의사나 간호사에게 쓰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환자나 보호자들에게도 쓰다보니 누구보다 가깝고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할 담당 의사와 환자 간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는 점이다.

최근 S대학병원에 급성신부전증에 따른 합병증으로 입원한 이정미(55·가명)씨는 "병원에서 병명과 치료법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많아 애를 먹었다"면서 "특히 수술 여부를 결정해 달라며 담당 주치의가 설명해줄 때도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무척 스트레스 받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병원 진료기록부는 더욱 심각하다. 실제로 환자나 보호자가 진료기록부를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설령 본다고 하더라도 영어나 의학 전문용어 투성이로 암호같아 무슨 내용인지 알기 어렵다.

영어로 휘갈겨져 써있는 것은 물론이고 땀띠나 땀샘처럼 쉬운 말도 한진(汗疹), 한선(汗線)이라고 쓰고, 손저림증은 수근관증후근, 심장마비(heartattack)는 카디악 어레스트(cardiac arrest) 등으로 기록하는 탓이다.

◇ 영어 좋아하는 한국의사 = 최근 흉부외과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는 한·중·일 3국간의 의학용어 일치비율과 실제 진료 현장에서 영어를 얼마나 사용하는지를 분석했다.

이번 연구는 흉부외과의 심폐바이패스(심장과 폐를 외부 기계가 대신해 주는 기법)에서 사용하는 혈압, 온도, 수혈, 심장마비 등 총 129개 용어를 표본으로 삼았다.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일본과 용어 일치도가 높고 실제 임상 현장에서 중국, 일본에 비해 영어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순수 자국어만 쓰는 비율은 중국이 93.0%로 상당히 높았고, 자국어와 영어를 합성해 사용하는 일본의 경우에도 10.8%에 달했지만 유독 한국만 129개 용어 중 단 하나도 없었다. 가히 영어와 한자, 일본식 한자 등이 뒤범벅이 된 한국의 의학용어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 결과인 셈이다.

실제로 한자 어휘가 공통요소인 3국은 의학용어 일치율이 21.7%였고, 특히 한국과 일본은 무려 86.8%가 같은 용어를 쓰고 있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은 일치율이 24.8%에 그쳤다.

김 교수는 "서구에서 확립된 현대 의학의 도입을 가장 주도했던 일본이 20세기 초 한국을 강점해 일본식 한자 용어가 일방적으로 유입된 반면 해방 이후 한동안 중국과 외교적 단절 상태가 지속돼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 우리말로 바꿔도 U-턴 = 물론 의사들도 의학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미 바꾼 의학용어에 대한 일부 학회의 반발로 다시 옛 용어로 회귀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등 임상 현장에서 정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2001년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학용어위원회는 환자들에게 낯설고 어려운 영어나 전문용어, 한자식 표현 대신 우리말을 쓰기 위해 2001년 의학용어집 4판을 내놨다.

당시 의학용어집은 '습관절→무릎, 구순→입술' 등 한글화를 추진해 일부 성과를 나타낸 반면, 갑상선을 '방패샘', 골다공증을 '뼈엉성증', 직장을 '곧창자' 등으로 바꿔 관련 학회에서 큰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의학용어위원회 특별자문위원이기도 한 지제근 교수는 "의학용어집 4판의 경우 지나치게 용어를 순화하는 바람에 오히려 의학계에서 거부감을 드러냈다"면서 "내년에 출판될 5판에는 4판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바꿨던 내용을 의학계 의견을 반영해 합리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의학용어의 우리말화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해부학회의 경우 1학년 의예과생들을 대상으로 '대퇴골'을 '넙적다리뼈'로 바꿔 교육했지만, 당장 2학년만 올라가도 넓적다리뼈라는 용어를 거의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A종합병원의 한 교수는 "의학용어는 워낙 전문가 영역인 만큼 무조건 한글화하는 작업은 수많은 오류와 비합리적인 시행착오를 불러올 것"이라며 "영어로 못알아 듣는 복잡한 용어들을 한국어로 바꾼다고 해도 의사 설명 없이는 알아듣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SLE' 또는 'Lupus'는 '전신성홍반성낭창'인데 이걸 한글화해도 알아듣기 어려운데다 오히려 영어로 표기할 때가 훨씬 쉽고 간결하다는 얘기다.

◇ 이제는 정부가 추진? = 의학용어의 한글화를 놓고 논란이 일자 급기야 정부가 나설 태세다. 기획예산처는 최근 공공기관 서비스 개선을 위한 시민제안을 접수한 결과, 국·공립병원부터 의학용어를 한글로 바꾸자는 의견이 제시됐다며, 이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의료진들에게 당연히 생각하는 의학전문용어들이 환자들 입장에서는 의사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이로 인해 의료진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셈이다.

예를 들어 Tx는 치료, Pt는 환자, inj는 주사, OP는 수술, expire는 사망하다, Prn은 필요할 때마다, Cx는 합병증, irrigation은 세척, secretion은 분비물, I&O는 섭취량과 배설물, urine은 오줌, Acute는 급성, MeD는 투약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

물론 이같은 제안이 현실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기획예산처 역시 "아직은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한 단계이며 이 방안 시행을 확정한 것은 아니다"며 "다만 이 방안을 시행한다면 국립대학병원을 비롯한 공공의료기관부터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구나 정부가 의학용어의 한글화를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현장 의사들이 쓸 것이냐 하는 점이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전문의학용어의 경우 무작정 쉽게 풀어쓰려다보면 교과서에만 존재하고 임상현장에서 쓰이지 않는 소위 '죽은 용어'만 양산할 우려가 있다"며 "특히 일상용어와 달리 전문용어는 일반국민보다 의사들의 채택 여부가 중요한 만큼 사전에 충분한 논의를 하지 않을 경우 자칫 반발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루는 의료현장에서 환자와 의사 간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상용어와 의학용어 간의 벽을 낮추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제근 교수는 "미국 등 영어권 나라에서는 의사들이 쓰는 의학용어의 80%를 일반인도 쓰고 있다"며 "의사들이 난해한 의학용어를 써서 권위를 찾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말했다.

김태형기자 kth@m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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