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33>김좌진 장군 생가·묘와 대종교

2007. 6. 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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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당시 북간도 지역과 중국 전역의 독립운동사를 거론하며 대종교(大倧敎)를 잊어서는 안 된다. 백야 장군을 지휘한 백포가 대종교인이었음은 물론 백야 자신도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자진 입교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다수 요인들과 이시영 초대 부통령, 철기 이범석 장군 등도 대종교인이었음을 잊은 사람들이 많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신봉하는 정통 민족종교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가 교리의 핵심이다.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절통하게 남긴 말이다. 그러고는 숨을 거뒀다. 1930년 1월 24일 만주 중동철도선 산시역 앞 정미소에서 일제 사주를 받은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죽은 것이다. 비보를 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제 압박 사슬에서 신음하던 국내외 동포들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고 하늘도 무심하다며 원망했다. 그것도 일인이 아닌 동족의 손에 의해 무참히 쓰러지다니….

◇백야 김좌진 장군 묘(앞쪽)와 아버지 묘. 기막힌 곡절 끝에 부인과 함께 잠들어 있다. 이날 충남 보령 지역에는 지척을 분간 못할 폭우가 내려 시야마저 가렸다.

만인의 추앙을 받던 영웅호걸도 세상을 등지고 나면 사람에게서 잊혀지는 법. 한으로 남는 건 가족일 뿐이다. 그 후 백야는 부근 야산에 묻혔고 새로운 독립투사들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하마터면 그의 묘도 돌보는 이 없이 현지에 남아 실전 위기에 처할 뻔했다.

그러나 백야에게는 그 못지않게 담력이 센 부인 오씨가 있었다. 1940년 9월 간악한 일제 경찰과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현지에 가 남편 유해를 몰래 파냈다. 괴나리봇짐으로 위장한 남루한 행색의 촌부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험로만을 택한 천신만고의 행보 끝에 고향 홍성에 이르렀고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평토분(平土墳)으로 밀장해 버렸다.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혔고 그의 묘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지만 오직 오씨 부인만 아는 비밀이었다.

광복 이후 백야는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57년 오씨가 죽자 보령에 있는 선산에 나란히 합장되었다. 이 같은 그의 묘지에 얽힌 비사는 후일을 사는 우리들에게 민족정기 선양이란 측면에서 크나큰 교훈으로 남는다. 1910년 3월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 유해를 못 찾아 애태우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현재까지도 서울 효창공원 내 안 의사 묘역에는 유해 없이 비석만 남아 있어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생가 정문의 문패.

안동김씨(신안동파)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 생가와 묘역 취재에는 한국풍수지리중앙회 거봉 김혁규 회장과 10여명의 간부들이 도움을 줬다. 간산 길이 거듭되다 보니 좌향 측정, 내룡맥 검증, 입수, 파구 등의 정밀한 확인 등이 조직적으로 이뤄진다. 두세 번의 교차 측정 끝에 오차라도 생기는 날이면 볼멘 질타를 누구나 각오해야 한다. 뒷날 풍수 학인들이 현장을 찾아 나경을 꺼내 들었을 때 편차라도 발견되면 신뢰도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백야의 생가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홍성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안면도 가는 길목 왼쪽에 있다.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6번지. 새로 복원한 집이어서 단정하기는 한데 90여칸의 옛 규모는 아니다. 백야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일본군 간담을 서늘케 한 명장일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민족의 선각자였다. 15세(1904) 때 대대로 내려온 노복 30여명을 모아 종 문서를 찢어 불태우고 속량했다. 논밭을 고루 나눠준 뒤 가산을 정리해 호명학교를 세우고 가옥 전체를 교사로 제공했다. 그 후 서울에 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장의 길을 걷게 되는 인생 역정을 자청하게 된다.

"다 같이 집 앞의 만궁수(彎弓水·활처럼 반원을 그리며 감아 도는 물)를 봅시다. 을좌(동에서 남으로 15도) 신향(辛向·서에서 북으로 15도)의 서사택인데 입수와 파수가 너무 좋습니다. 계(癸)방에서 물길이 비쳐 정(丁)방에서 감춰 버리니 우측에서 좌측으로 활같이 굽어진 수국 아닙니까."

거봉의 국세 설명은 이어진다.

◇김좌진 장군 사당 백야사. 최근 건립되었으며 영정이 봉안돼 있다.

"백야 생가에 와서는 기다랗게 엎드린 우형(牛形)의 앞산을 주목해야 합니다. 짧은 우백호를 외백호가 감싸면서 이어져 내려와 안산과 조산을 이뤄 놨어요. 더구나 청룡 끝자락의 '한수구'(산이 물길을 막아 기를 머물게 하는 지점)는 후손들의 장래를 예견해 볼 수 있는 풍수학적 물형입니다."

그러고는 탤런트 김을동과 아들 송일국이 저 산 기운을 받아 인기를 누리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외손발복지지라는 얘기다. 생가 토방에 올라서니 외청룡이 안방을 향해 고개 숙인 읍국(揖局)으로 다가온다. 여성풍수로 양택풍수에 뛰어난 수제자 심순희(55)씨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 섰다. 벌써 뜰 안을 한 바퀴 돌아 측정을 마친 것이다.

"진좌(동쪽)에 손방(동남쪽)의 대문이니 연년택(延年宅)으로 복을 누리며 재주 있는 사람이 나와 성공했을 것 같아요. 안방은 생기복덕 방향에 앉혔고 우물은 포태법상 욕(浴)방이어서 가뭄에도 물 걱정 안 할 자리입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했던가. 거봉이 확인 후 대견해 한다. 다만 생가 뒤의 사당 백야사(白冶祠)를 새로 지으면서 간(艮·동북쪽)방의 입수 용맥을 크게 훼손한 것이 못내 아쉽단다. 집 뒤의 내룡맥은 사당의 좌청룡에 해당하는데 파헤쳐 버린 것이다. 손좌건향의 사당에는 백야의 영정이 봉안돼 있으며 분향 행렬이 끊이지 않는단다.

아침부터 찌푸리던 날씨가 오후에는 폭우로 변해 간산 길을 훼방 놓는다.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0번지. 아버지(형규) 묘 밑에 묘좌유향으로 백야는 안식하고 있었다. 기념물 제73호로 지정(1989년 12월 29일)한 탓에 묘역 주변을 훌륭하게 가꿔 놓았다. 바로 너머가 토굴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읍 독배 마을이다. 짠 음식이라면 질색하는 일인들도 '광천새우젓'만은 한 젓가락씩 집어 먹고 밤새 물을 켰다고 한다.

◇대종교 경일행사. 단군을 교조로 하는 민족종교로 일제 당시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대종교인들이었다.

"내청룡은 끊어지고 외청룡으로 이었으니 아들이 귀한 지형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 자리도 백호는 아주 훌륭합니다. 안산이 멀고 조산이 겹쳐 있어 친손들의 관록(官祿)은 더디겠지만 긴 안목에선 발복을 기대할 만합니다. 특히 외청룡 밖의 귀봉(貴峰·혈처에서 보이는 잘생긴 봉우리)이 마(馬)채 형상이어서 김두한 협객 같은 아들을 두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런 지기의 영향으로 외손이긴 하지만 백야-두한-을동-송일국의 4대 계보가 형성되지 않았겠느냐는 풍수학적 풀이다. 억수같은 비가 시야를 가려 입수 용맥, 입수와 파구 등은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했다. 할 수만 있다면 백야 장군이 아버지임을 긍지 삼아 조선상인들을 보호하고 종로 주먹세계를 평정했던 아들 김두한의 묘도 이곳에 함께 있었으면 하는 인지상정이다.

◇사당 앞에 있는 백야 장군 유언비.

항일 전쟁의 백미로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는 청산리전투(1920년 10월 21∼26일)는 백포(白圃) 서일(徐一·1881∼1921)의 지휘 아래 김좌진, 이범석(연성대장·초대 국무총리), 나중소(참모부장) 등의 통솔로 일본군 3300여명을 섬멸한 독립전쟁이다. 일본군은 청산리에서의 패전으로 엄청난 치욕과 타격을 입었다.

1909년 홍암 나철 대종사가 중광(重光·다시 세움)을 선포하며 비롯된 대종교는 일제하 만주벌판을 떠돌며 독립운동하던 우국지사들을 하나로 묶는 민족신앙의 결집체였다. 3·1운동보다 1년 앞선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 지도자 39명이 서명했고 백야도 동참했다. 이로 인해 일제의 대종교와 독립군 압살정책은 극에 달했고 청산리전투 이듬해인 1921년 경신년 대토벌작전에서 희생당한 교인과 독립군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소설 '단(丹)'의 주인공으로 축지법을 쓴다 하여 화제가 되었던 권태훈옹과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 등이 대종교 총전교(교단 최고지도자)를 지냈다. 총본사는 서울 서대문구 홍은2동 13-78번지에 있으며 민족이 처한 누란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섰던 왕년의 교세 회복을 위해 포교책을 강구하고 있다.

인간의 죽음에 누구인들 안타깝지 않겠는가. 백야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독립전쟁을 계속했더라면 그의 용맹성과 불굴의 투지로 보아 독립운동의 판도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그의 유덕이 더욱 간절히 기려짐은 비단 필자만의 작은 감상이 아닐 듯싶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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