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은 에도에서 관백을 만났을까?

2007. 6. 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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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엽 충남대 교수 안용복 일본행 근거 발표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안용복)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ㆍ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숙종실록 30권 9월)'

숙종 22년(1696) 9월 비변사는 조정의 허락없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돌아온 안용복을 체포ㆍ추궁한다. 당시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진술한 내용은 숙종실록에 그대로 실려있다.

안용복의 진술 가운데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와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2차례에 걸쳐 일본 땅을 밟는다. 안용복이 말한 근년은 1693년의 일로 안용복은 나라에서 출입을 금지한 울릉도에서 조업을 하다 물개잡이를 하던 일본인에게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간다.

안용복은 이후의 일에 대해 "조취번(鳥取藩)에서 심문을 받은 뒤 막부가 있는 강호(江戶=에도, 현재 도쿄)에 가서 관백(일본 막부의 최고책임자)을 만나 울릉도와 자산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다"고 진술한다.

안용복은 또 "일본 관백이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고 증서를 써줬으나 대마도 사람에게 관백의 서계를 뺐겼다"고 덧붙인다.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은 독도에 대해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에 결정적인 반박 근거가 된다.

안용복이 에도에서 관백을 만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은 독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본을 통해 독도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을 허구라고 단정한다. 안용복의 진술만을 미루어 에도에 갔다고 인정할 수 없으며 정부 관리도 아닌 안용복을 일본의 최고실력자가 만났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국내 학계도 그동안 숙종실록에 실린 안용복의 말을 뒷받침할 만할 마땅한 근거가 없어 안용복의 에도행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충남대 권오엽 교수는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제3회 한국영토학회 학술토론회에서 발표할 논문 '안용복의 도일(渡日)활동에 대한 사적(史的) 검증'을 통해 안용복의 에도행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발표할 예정이다.

권 교수는 안용복을 납치한 오야(大谷) 가문이 남긴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島度海由來記拔書控)'에서 안용복을 납치해 에도에 보냈다는 구절인 '당인강부강어인도 즉강호표어천착 상제순 어증귀(唐人江府江御引渡 則江戶表御穿鑿 相濟順 御贈歸)'를 찾아냈다.

'당인(唐人=조선인)을 에도 막부에 인도하고, 에도 막부는 즉시 심문했다. 조사가 끝나 순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내려주고 귀국시켰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다.

권 교수는 호키(伯耆 현재 일본 시마네 현 일대)번의 역사를 기록한 이본백기지(異本伯耆志)에서도 안용복의 에도행을 기록한 구절을 발견했다.

이본백기지에는 '명을 받아 무기를 싣고 이르렀다. 조선인이 그 섬의 오사카포(大坂浦)에 숨었다. 남은 두 사람(안용복ㆍ박어둔)이 있었다. 즉시 그들을 잡아 귀항하여 관에 고소했다. 명이 있어 토베에(藤兵衛)가 이인(異人)을 거느리고 본부에 갔다. 번사 가노와 오제키가 수호해 이인을 에도에 불러들였다가 조선으로 보냈다. 그 후 나라에서는 죽도는 조선의 땅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말하기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책은 또 쓰시마 번사(藩士) 히라타 시게 자에몬(平田茂 左衛門)과 로 로쿠로 우에몬(瀧六郞 右衛門)이 "안과 박은 에도에 보내졌다. 에도 막부는 죽도는 조선의 땅으로 그들을 납치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데려 온 자를 참죄에 처했다. 안과 박은 에도에서 대접을 받았는데 쓰시마에서는 점점 죄인처럼 취급됐다"고 말한 내용을 전한다.

숙종실록과 발해공, 이본백기지 등을 종합하면 안용복을 납치해 심문한 자의 기록, 납치당한 안용복의 진술, 안용복을 조선에 송환시키는 임무를 맡은 쓰시마의 기록 모두가 안용복의 에도행을 인정한 셈이다.

안용복의 에도행이 사실이라면 안용복이 관백을 만났으며 관백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수 있다.

권 교수는 "일본학계는 그동안 안용복을 범법자로 취급하며 그의 진술을 면죄를 위한 발언으로 치부해왔다"며 "이제 편향된 사고를 버리고 안용복의 진술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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