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먹스승은 시라소니였다"

2007. 4. 2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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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탈옥이라는 죄명으로 받은 5년의 징역형. 그리고 7년간의 보호감호 생활, 교도소 난동으로 받은 2년의 추가형. 그렇게 13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 중 엄중독방 생활만 10년이었습니다.

피를 보며 살아온 삶이었지만, 그는 말합니다. '세상을 증오한 게 아니라 사랑한 것이라고…비록 그 방법이 옳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세상을 사랑했다'고.그리고 그는 또 말합니다.

'이제 세상과 화해하고 싶다고, 폭력세계에서 주먹과 칼을 휘두르며 독버섯처럼 살아온 생활을 청산하고정당한 방법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종로에서 보석무역 가공업을 하면서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이상훈 대표. 남은 인생은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살고 싶다는 이상훈 대표를 4월 24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세계의 평화를 위해 떠나는 여행

▶ '2007년 세계평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어떤 상인지 설명을 좀 부탁할게요.

18개 국가의 시상위원들이 1년에 걸쳐서 세계 178개국의 인권과 세계평화에 기여한 사람들을 선출해서 심의를 거쳐서 주는 상이에요.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생전에 만드셨다가 사후에 존 레겟 미 8선 의원이 다시 승계를 하고 지금은 레스터 울프 박사님과 178개 국가의 모든 임원들이 구성되어있는데 전직 대통령들이 많이 받기로 유명한 상이죠.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수상을 비롯한 역대 수상자들이 있어요.

▶ 대표님은 어떤 것으로 수상을 하신 것인가요?

제가 받게 된 동기는 북한의 영유아 어린이들을 위한 식량 지원운동과 인권부분에 사회보호법 폐지나 삼청교육대 피해보상법안 등 이런 운동들이 국제사회에 알려져서 그것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 상금도 있습니까? (웃음)

상금은 세계평화에 기부하는 것이니까요. (웃음) 상을 받게 되면 세계 평화순회대사로서 국제금융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습니다. 세계 각국의 빈곤한 국가를 방문할 수 있는 모든 경비 일체를 지급을 받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각 분쟁국을 다니면서 그 나라의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을 만나고, 인권유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미국의 세계평화봉사단 본부에 제출하게 되면 해결이 되는 그런 기구를 가지고 있죠.

▶ 상을 받으신 만큼 책임도 무겁고 앞으로 하실 일들도 많으실 것 같은데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상을 받을 때 시상위원들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이와 같은 사람에게 상을 줌으로써 더 많이 열심히 세계를 다니면서 뛰면서 일을 하라고 이 상을 주었다"...앞으로 빈곤국가와 북한을 자주 방문해서 특히, 북한에 질병과 식량부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유아들에 대한 식량지원운동사업을 전 세계적으로 해나갈 계획에 있습니다.

◇ 중국에서 본 잊을 수 없는 북한 아이들의 참상

▶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와 북한 어린이 돕기 이외에 하시고 있는 일로는 어떤 것이 있으세요?

가발회사를 운영하다가 보류시켜 놓은 상태이고 보석을 가공해서 국내 내수와 외국에 수출하는 보석회사를 하고 있습니다. 보석가공무역회사이죠.

▶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은 언제, 어떻게 시작을 하시게 된 건가요?

14년의 징역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 생계를 위해 바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93년 12월 25일에 가석방으로 나와서 94년 2월에 무역사업자 등록을 하고 감옥에서 배웠던 실무인 영어, 일어, 중국어를 밑천으로 처음 뛰어든 것이 중국 시장이었죠. 그래서 중국 전 각지를 다니면서 청도, 상해 등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무역 쇼를 통해 중국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물건들과 샘플을 사다가 한국에 가지고 와서 장사를 시작했지요. 마침 북한과 인접한 단둥지역을 다니는데 지금은 철저히 단속을 하고 발포명령까지 내려져서 심각한 상태지만 그때는 북한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많이 생활을 하시더라고요. 단둥시장을 배회하면서 본 한족으로부터 받고 있는 여러 가지 부당한 대우와 어린아이들의 허기지고 굶주린 모습들, 그리고 물건을 훔치다가 중국인들에게 매를 맞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안타까움이 단체를 설립한 계기인 것 같아요.

▶ 그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셨나요?

남한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접촉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쳐다보지도 않고 아주 냉담하게 그냥 가버리죠. 12살에서 18살 사이의 아이들이 두세 명씩 무리를 지어 다녔는데 행색은 우리나라 전쟁 후인 5,60년대 못 먹고 굶주리고 헐벗은 그런 모습이었어요.

▶ 여자아이들도 있었나요?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중국인 가정에 어머님들과 함께 식모생활을 같이하더라고요.

▶ 그래서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을 시작하신 거군요.

2004년 용천폭발사고로 다친 아이들을 보면서 이때야말로 저 아이들을 돌볼 때라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회사 지인들과 주변의 지인들을 비롯한 전국의 재소자들이 제가 사회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성금을 보내주었지요.

◇ 사랑의 빵을 뜯으며 나누는 평화의 외침

▶ 그러면서 북한에도 직접 가신 건가요?

조선 그리스도교연맹 강영섭 위원장은 북한에서도 그렇고 세계에서도 종교인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신데 그분과 2005년 3월에 북경에서 회담을 갖게 되었어요. 관리를 통해서요. 저는 중국의 가발 원모를 구하려 사업차 중국도 많이 다니고 북경에 지사가 있었죠. 거기서 사랑의 빵을 보내는 제안을 받고 또, 북한 측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장비를 부탁하더라고요. 그 당시 평양에서는 2005년까지 미국 종교재단에서 하던 큰 빵 공장이 있었어요. 하루 2만 개 정도의 빵을 생산해 내는데 어느 날, 미국 십자군 재단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강영섭 위원장님이 기자재와 빵 공장 설립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주시면서 원조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 안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서 조금씩, 조금씩 진행을 하다 보니까 2005년도에는 5,000포대(100톤)를 보내는데 거액이다 보니 지인의 협조를 받아 의약품 등을 먼저 실어 보내드렸어요. 5,000포대면 100톤인데 빵으로 만들면 20킬로 하나에 500인분을 만들 수 있어요. 국수는 40톤이면 약 90만 명의 식량이 되고요. 현금으로 환산하면 밀가루 1포대를 만원, 운송비용을 천원 기준으로 잡으면 11,000원 정도가 되고 지금은 더 올랐으니까 육천 백여만 원 정도일 겁니다.

▶ 북한에서는 대표님이 과거에 어떤 분이었는지, 주먹을 쓰던 분이었는지 알고 있나요?

작년 9월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방송을 통해 국제 사회에 알려졌으니까 알고 있겠지요.

▶ 그런 부분을 북측에서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나요?

아주 자연스럽고 자기들이 필요한 것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안 해요.

▶ 굉장히 자그마하시고 단정하시고 온화하셔서 과거에 주먹 세계에 계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고향이 어디세요?

부모님은 이북 분이세요. 1950년도에 저희 어머님이 핏덩어리인 저를 안고 평양에서 부산으로 내려오셨죠. 그렇게 부산에서 자라다가 6살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 나의 주먹 스승은 큰아버지였던 '시라소니'

▶ 주먹세계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신 건가요?

해방촌은 북에서 내려오신 분들의 정착지였어요. 저희 가족도 실향민이다 보니 그곳에 살았고 해방촌은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주 거친 동네였어요. 시라소니가 제 큰아버님이세요. 시라소니와 저희 아버님이 의형제를 맺으셨기 때문에 저희 집에서 사시면서 이화룡, 신의주, 정팔이 아저씨를 그 시대에는 매일 보면서 살았어요. 저희 집에서 모이시다 보니까 어린 나이에 듣는 것이 만주싸움, 신의주싸움, 김두한이 형님 이야기를 비롯해서 매일 싸움하는 영웅담만 듣고 자라다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그랬죠.

시라소니 큰아버님의 아드님이 고교 최고의 싸움꾼이었는데 지금은 훌륭한 목회자세요. 어느 날 둘이 매를 많이 맞고 들어오니까 큰 아버님이 이마로 치기, 무릎치기, 관절 치기 등을 가르쳐주셨어요. 정말 전설 속의 싸움들을 조금씩 배우다 보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운 대로 하다 보니 6학년 형들도 이겼죠.

▶ 아버님도 주먹을 쓰셨어요?

아니요, 아버님은 정치를 하셨어요. 민주당 용산 지구당 위원장을 하셨고 열렬한 민주당원이셨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용서해 주지 않으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싸움을 하고 다니면서 지난 80년 사건 이후로는 정신적으로 결별을 선언하셔서 자식으로 인정을 못 받았죠.

▶ 80년 사건은 뭔가요?

80년 전두환 정권 때, 조직의 보스로 구속이 됐는데 상대편 보스를 살해하기 위해 재판받는 도중에 탈옥을 해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어요. 그 바람에 온 가족이 한국을 떠나게 되었죠. 여동생 세 명과 형님이 계셨는데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어머님이 남아 13년 6개월간 6개 교도소를 다니시면서 제 옥바라지를 하셨어요. 늘 새벽기도를 다니시면서 제가 사회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시고 지금은 과테말라에 가셔서 사역을 하고 계세요.

▶ 처음에 감옥을 가게 된 것이 그때인가요?

80년부터 수배가 되어서 81년에 상대편 보스의 밀고로 영등포구치소에 갇혔는데 복수의 칼날을 갈았죠. 6개월간 연구한 끝에 교도소의 탈옥은 힘드니까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자고 모의를 하고 재판정에서 탈옥을 했어요. 그것이 81년의 6월 5일 남부지방법원 탈출사건이고, 저를 비롯한 3명이 성공을 했지요. 그 당시 간첩 현상금이 500만 원이었는데 저희들은 현상금이 3,000만 원이었고 바로 발포명령까지 내려졌어요. 그런데 60여 명의 교도관들이 실직을 당한 것을 비롯해 더 많은 피해자들이 생기더라고요. 꼭 신원을 지켜줘야 하는 사랑하는 여인도 피해가 가서 결국 5일 후에 대검찰청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서 자수를 했어요. 나머지 동생들도 자수를 시켰고요. ▶ 조직원이 많으셨나요?

영등포는 각 지역에 동생들이 있어서 행동을 할 때 몇 백 명씩 모아지니까 규모가 굉장히 컸어요. 대부분 주먹을 쓰는 친구들은 자기가 하는 것이 범법인 줄 모르고 있어요. 사회에 악이 되는 범죄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밥벌이를 위한 생활의 수단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요.

◇ 감옥에서 만난 고은 선생님과 김대중 총재, 그리고 민주화의 젊은 피

▶ 상대방 보스를 죽이려고 탈옥까지 하셨는데 상대방 보스는 어떻게 되었나요?

다 도망갔더라고요.

▶ 지켜주고 싶었던 그 여인은요?

피해를 안 미쳤지만 언론과 방송을 통해 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다고 들었어요.

▶ 어떻게 보면 독종으로 나라를 들썩하게 했던 소위, 조폭의 두목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었는지요?

자수를 하고 서울 구치소에 들어갔는데 시국사범들이 수감된 동에 갇혔어요. 그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라 매를 많이 맞던 시기였는데 학생들도 시위를 해서 끌려오면 격리를 시키고 심하게 구타를 당하던 때였죠. 제가 있던 독방은 '먹방'이라고 하는 햇볕이 절대 들지 않는 곳이었는데 밥이 들어오는 곳에 얼굴을 대면 할아버지 한 분이 늘 온화한 얼굴로 계셨어요. 그분이 바로 시인 고은 선생님이었죠. 매일 7,80명의 학생이 감옥 내에서 민주를 위해 시위를 하는데 교도관들이 기동 타격대와 무장으로 와서 끌고나가 구타를 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제 인생의 모습과 비교를 하게 되었죠. 연약하고 병약해 보이는 학생들이지만 투쟁을 할 때의 눈은 우리들이 보지 못한 눈이었어요. 그렇게 6,7개월 있으면서 변화의 의식에 눈을 뜬 거죠. 수감되기 전의 저는 사치와 향락,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범법을 저지르며 살아왔는데 그 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해 부르짖는 외침은 범죄인이 바라보는 세계와 학생들이 바라보는 세계가 같은 공간이지만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했고 그때부터 심경의 변화를 느꼈어요.

▶ 그 후로 모범수 생활을 하신 건가요?

청주교도소로 이송을 했는데 탈출범이라 격리시키려고 또 독방에 수감하더라고요. 시국사범을 비롯한 서울대, 건대 학생들,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 사북 탄광 노조위원장이 같은 동에 있었는데 제방 바로 앞에 김대중 총재님이 혼자 독방에 계셨어요. 그런데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김대중 총재 석방과 전두환 정권 퇴진을 부르짖는 거예요. 그런 학생들과의 접촉과 그들이 넣어주는 책들을 통해서 변화하게 되었어요.처음엔 이런 책보다는 담배 한 가치가 더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래도 학생들이 매일 좁은 식기 통으로 책을 넣어주었어요. 그러면서 한 학생이 이 책을 봐야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웃겼는데 독방이라 할 일도 없고 해서 성경책과 여러 가지 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15년 남은 징역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면서 책을 읽고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죠.

◇ 엄중 독방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 제가 듣기로는 독방에 너무 오래 있으면 정신분열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두 가지 유형의 독방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이 같이 생활하는 독방을 '일반 독방'이라고 하고 교도소에서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사고자들을 가두는 '엄중 독방'이라고 해요. 엄중 독방은 옆의 재소자들과 대화 자체를 할 수 없고 자살도 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어요.저는 엄중 독방에서 10년을 살았는데 그 학생들이 철학, 심리, 문학, 소설, 법률 책을 넣어주면서 매일 돌아가면서 읽으라고 했어요. 주먹과 얼굴만 믿고 살아와서 도저히 책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했더니 그 책을 읽어야 살아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신적 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제가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책을 봐야 했던 거죠.엄중 독방생활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정신분열현상이 드물게 일어나는데 책을 읽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고 6개월만 지나면 반드시 정신분열현상이 일어나요.

▶ 시국사범들이 일종의 은인이었네요.

초기 은인은 한 여학생으로부터 시작됐어요. 81년 1월 25일에 경찰서에서 유치장으로 넘어가는 유치장 호송버스에서 아주 연약해 보이는 여대생이 있었어요. 아주 청순한 여학생이었는데 호송차에서 내리자마자 군사정권 타도를 부르짖는데 구타를 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굽히지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눈빛을 바라보는데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여인의 눈빛이 아니었어요. 우리 같은 죄인들은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는 눈빛이었죠. 그 여학생이 나에게 했던 '당신도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인생이 바뀌어 지는 강한 쇼크가 그때 왔었죠.

▶ 14년 만에 사회에 나오셨으면 주변의 유혹도 많으셨겠어요?

유혹이 많았죠. 세상물정을 몰라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제게는 감옥에서 수만, 수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다져진 프로그램대로 인생이 가야 한다는 신념과 함께 어머님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 파란만장한 전반전이 끝나시고 이제 새로운 행복하고 희망찬 후반전을 시작하신 것 같은데 앞으로 진행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부탁합니다.

북한의 330만의 영유아들 중에서 결핵환자가 80만이 넘고 약 350만 톤 이상의 식량부족으로 고통과 어려움을 받고 있어요. 지금이 북한의 영유아들과 임산부에 대한 식량지원이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하고자 제주에서 판문점까지 걸어가는 도보 운동을 계획하고 몸을 다지고 있습니다. 계획안이 나오는 대로 함께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고 각계각층의 후원과 참여도 부탁드립니다.저는 세계평화상을 받았으니 앞으로 세계 빈곤 국가에 다니면서 그들의 모습을 국제사회에 많이 알리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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