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명저 50] <10> 정민의 '한시 미학 산책'

2007. 3. 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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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서정으로 律의 기품을 품다

"시대와 코드 맞춘 게 인기 요인인 듯"

정민(46)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솔 출판사)은 전문 연구자들도 결코 만만히 접근할 수 없는 두개의 주제를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룬 교양예술서다.

한시를 짓는 전문 시인이 더 이상 배출되지 않고, 한시에 대한 관심이 그저 회고나 호사 취미로 여겨지는 풍토를 생각하면 1996년 7월 첫 출판된 이 책이 20쇄나 인쇄됐다는 사실은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불러도 될 만하다.

<한시미학산책>은 동아시아의 한시 이론을 빌려 중국과 한국 한시를 주제, 형식, 작법에 따라 24개의 테마로 분석한 책이다. 중국의 두보, 이백은 물론이고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정지상 등 국문학사를 장식한 대시인의 작품과, 계몽기의 언문풍월 등을 포함해 소재의 공간적ㆍ시간적 스펙트럼이 광대하다.

출간된 지 11년이나 지났지만 전적(典籍)의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한시에 현대적 감각을 입혀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간 책으로 이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찾기가 쉽지 않다. 책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정민 교수는 2002년 <한시미학산책>의 청소년 버전인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 등 그가 쏟아낸 엄청난 분량의 저작들은 대부분 대중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글이다. 그러나 그를 이른바 '대중적인 한문학자'로 자리매김한 책은 역시 <한시미학산책>이다. 이 책은 애초 고급 독자인 시인이나 시인 지망생을 겨냥한 것이다.

두보 연암 이규보 등 대가들의 작품 미학주제 형식 작법에 따라 24개 테마로 분석친절한 글로 한시의 가치를 대중적으로 일깨워

그 계기는 우연했다. 93년 12월 <현대시학>의 정진규 주간이 젊은 연구자였던 정민 교수에게 '옛 시인들의 한시 쓰기'에 대한 원고를 청탁한 것이 인연이 됐다. 큰 부담 없이 글을 썼지만 지면에 발표되자 박희진 유안진 같은 중견 시인들이 "도대체 정모 라는 사람이 누구냐?" "폴 발레리의 시 이론들보다 훌륭하다"며 관심을 나타냈다.

'시학'이라면 자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을 연상하던 시인들에게 연암이나 이규보의 이론을 통해 시를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 교수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500년 동안 작시(作詩)를 통해 관료를 충원했던 국가라면 얼마나 시 이론이 융성했을 지를 상상해보라. 그런데 당시에는 어떤 시인도 그 부분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시인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94년 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현대시학>에 한시론을 연재했고 이 글들을 517쪽 분량의 단행본으로 묶어 <한시미학산책>을 냈다.

연재기간 동안 매달 원고지 70~80매 분량의 원고를 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박사과정을 밟으며 <동문선> <시화총림> 등 한국 문집 30여종의 대표적 시화와 시 이론을 직접 뽑아 <한국역대시화유편>(아세아문화사, 1988)을 편찬했던 경험이 노작(勞作)의 원동력이 됐다고 그는 말한다.

대중적 성과 뿐 아니라 한시를 미학적 관점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한문학계는 다른 분야처럼 80년대의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리얼리즘 이론으로 작품을 분석하는 연구가 지배적이었다.

예컨대 다산의 애민시나 농민시, 현실문제를 다룬 위항인(중인)들의 한시를 분석한 연구가 넘쳐 났지만 미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은 드물었다.

'이데올로기만 남아있고 아름다움을 논하지 않는' 당시 문학 담론에 대한 그의 염증(厭症)은 깊어졌고 이는 곧 새로운 미학이론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졌다.

그가 대학원에서 조선의 두보라 부를 정도로 화려한 시풍을 자랑하던 권필의 시세계를 다룬 논문을 썼고, 한때는 대학 문학동아리에 몸담았던 시인 지망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시미학산책>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결과 였는지도 모른다.

딱딱한 이론서 스타일이었다면, 이 책이 다룬 한시 이론을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흥(情)과 사물(景)을 결합시키는 기법인 '정경(情景)이론'만 하더라도, 경을 보고 정을 일으키는 정수경생(情隨景生), 정을 머금어 경에 투사하는 이정입경(移情入景), 둘의 선후를 구분하지 않는 정경교융(情景交融) 등 복잡하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내고서야 비로소 대중과 소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그의 고백처럼 '친절함'은 이 책이 가진 지고의 미덕이다.

편안한 문장, 개인적인 경험을 사례로 설명하기 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글쓰기 방식은 인문학 교양서의 전범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물론 기술의 엄정성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학계는 그의 '발랄한 글쓰기'를 불편해 했고, 그가 새로운 이론적 분석틀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존재했다.

그러나 "한시 이야기만으로 대중 독자에게 고전의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시는 한 글자 한 글자 유장한 함축미를 품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 읽어도 오독하기 십상이다.

일반인이 한시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대중과 한시를 얼마나 가깝게 만들어 주는가를 증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돋보인다. 예를 들어 연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쓸쓸한 내면풍경을 가을 밤의 정경에 빗댄 두목(杜牧)의 <추석(秋夕)>이라는 한시에 대한 해설을 읽어보자. '홀로 지새는 깊은 가을밤, 달마저 져버린 창가로 반딧불이 날아다닌다. 옛 사람은 풀이 썩어서 반딧불이 된다고 믿었다.

반딧불은 황폐한 풀 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것인데, 그 반딧불이 그녀의 창가를 날고 있으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알 수 있겠다. 님이 찾지 않으니 그 꽃밭엔 잡초만 우거져 있을 것이다. 또 그녀는 반딧불을 부채로 후려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저리가!" 하며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그 자체로 문학적 완결성을 지니는 문장이다.

정민 교수가 꾸준히 제기한 '고전의 현재적 가치란 무엇일까'라는 문제의식은 이미 이 책에서 단초가 드러난다.

조선말 김 삿갓이 선보인 파격시를 80년대를 풍미한 일군의 해체시와 비교하는 대목이 그렇다. 저자는 고약한 시골훈장을 기롱한 김 삿갓의 시에 대해 '언어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찾아볼 수 없다'고 일갈하는데 이는 80년대를 풍미한 일부 해체주의 시에 대한 비판과 맞닿아있다.

무질서한 세계, 파편화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하는 유희적인 해체시가 김 삿갓의 밀도 낮은 기롱시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되묻고 있는데 이는 고전의 해석방식을 현대에 적용한들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반문과도 같다.

정민 교수는 올 하반기에 개정판을 펴낼 계획이다. 을지문덕에서 구한말까지의 오언절구 300수와 칠언절구 300수를 엮은 <한시선>과 함께 개정판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한시미학에 대한 이론과 실재가 완결된다는 의미에서 <한시미학산책>의 재탄생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 정 민 프로필

1961년 충북 영동출생.

1983년 한양대 국문학과 졸업.

1991년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2001년 한국18세기학회 부회장

저서 <한시미학산책>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

"시대의 코드와 호흡했기 때문이겠지요."

<한시미학산책>을 통해 대중독자를 위한 '소통의 글쓰기'를 선보인 정민 교수는 이 책의 성공요인으로 '시대코드'를 꼽았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를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하는 것이 시'… 문장 하나하나마다 '시의 미감적 원리'에 대한 젊은 문학도의 고뇌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가 이 책을 쓴 90년대 초는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하던 시기다. 개인적으로도 이데올로기가 문학의 본령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굳힌 때였고 사람들도 박노해 대신 도종환과 이해인을 찾기 시작했다. 한시를 통해 시의 미학적 원리를 진지하게 탐구한 이 책이 신선한 울림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정민 교수는 당시만 해도 학계에서 금기시됐던 자유로운 글쓰기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시대와 소통했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어릴 때는 삼국지라면 오직 박종화의 삼국지를 의미했지만 지금은 이문열이나 장정일의 방식이 아니라면 읽어낼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시대가 바뀌면 글 쓰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 책을 쓰면서 비로소 그 문제를 민감하게 인식하게 됐다"고 부연했다.

지금은 문화의 영역으로 관심사가 바뀌었지만 정 교수에게 이 책은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젊은 날의 초상 같은 것이다. 그는 "지금도 시인들이 책을 잘 읽었다며 시집을 보내주곤 한다"며 "소통의 즐거움으로 글쓰기의 과정 자체를 즐기던 그 때를 결코 잊을 수 없다"며 껄껄 웃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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