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개혁의 위기]1-1. 무능한 진보개혁 세력

2006. 11. 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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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한 회사원이었습니다. 그러다 1997년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누나가 쌍둥이 딸을 낳고, 애들을 키우기 위해 영어학원 강사 일을 그만둔 뒤였죠.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잡화점 장사가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매형은 살고있던 잠실 주공아파트를 팔아 누나에게 피부마사지실을 차려주고 운전연수 일을 시작했습니다. 매형은 여성전용 마사지실에 함께 사는 게 마뜩찮아 1년전부터 고시원에서 살았어요. 쌍둥이 딸들은 전남 구례에 있는 외가에 보냈죠. 워낙 낙천적이라 기껏 한달에 1백50만원을 버는 운전연수 일을 하면서도 언젠가 가족과 한 집에서 살겠다는 희망뿐이었는데…."

지난 7월17일 서울 잠실의 고시원 화재때 숨진 손모씨(42)의 사연이다. 처남이 빈소에서 풀어낸 매형의 곡절은 '생계형 기러기 아빠'의 삶의 전형이었다. "그때 학원만 그만두지 않았어도…"라고 오열했던 아내 이모씨(42)는 화재 현장에서 찾은 그의 휴대폰을 씻어 귀중품함에 보관하고, 지금도 곧잘 두통약을 먹고 잠에 든다고 한다. 이씨 가족뿐일까. 잠깐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떠난 비정규직 손씨와 맞벌이 주부 이씨의 아픔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한다.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화(1987년)·남북화해(1997년)·정치개혁(2002년)의 깃발을 들고, '역사의 동력'을 자부했던 진보·개혁세력은 지금 혼돈 속이다. 5·31 지방선거 때는 총체적으로 '무능'이란 주홍글씨를 받았다. '무능한 진보가 부패한 보수보다 더 싫다'는 극단적 여론조사도 나왔다. 민주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서양사)는 진보·개혁세력을 보는 따가운 시선을 서울 대학로에서 롱런중인 김민기씨의 연극 '지하철 1호선'에 빗댄다. "지하철 1호선은 94년 초연때 '걸레'라는 이름의 창녀가 나오고, 남자 주인공인 '운동권' 청년을 숨겨주며 두 사람 사이에 싹튼 사랑과 휴머니즘(인간애)이 원래 내용입니다. 지금은 연극 설정이 바뀌었어요. 남자 주인공은 건달이고, 이 건달이 창녀를 만나며 운동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죠." 그는 '창녀 방에 숨어들던 운동권'이 '창녀가 만든 운동권'으로 바뀐 점을 주목하며 "민주화 이후 사회와 담론 변화도 똑같다"고 말했다. 위가 아니라 밑에서 세상을 바꿔야 삶이 바뀌고 진보한다는 비유이다. 진보·개혁의 위기는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는 삶과 그런 삶을 구출할 진보적 비전의 상실, 개혁의 부재에서 잉태되고 있다. 그것은 인식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숫자가 말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미국·멕시코와 함께 '3대 양극화 국가'로 기록되고 있다. 도시근로자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1·4분기 기준)는 1997년 4.81배에서 2005년 5.87배로 뛰었다. 90~96년 평균 7.9%였던 경제성장률은 2005년 4%로 둔화됐지만, 개인소득증가율은 이 기간에 7%에서 0.5%로 더 떨어졌다. 노동소득(임금+자영업자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90~96년 평균 81.6%에서 2004년 68.4%로 낮아졌지만, 자본소득은 그 사이 18.1%에서 31.6%로 높아졌다. 소득양극화가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세갈래 지표다.

"성장률의 둔화보다 노동·자영업 계층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더 줄었고, 고용없는 성장이 길어지며 계층간 소득불평등이 벌어지는 추세"(진보정치연구소)라는 분석이다. 잠실 고시원 화재 때 숨진 손씨의 '불행'은 막다른 벼랑에 내몰려 있는 '자영업 붐' 시대의 단면인 셈이다. 법정 최저임금(시간당 2,840원)을 못버는 사람이 지난해 8월 기준 1백21만명(8.1%)에 달하는 빈곤도 고착화되고 있다.

양극화의 핫코너는 지난해 8백40만명에 이르고 매년 증가세인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을 100으로 했을 때 비정규직의 월 임금총액은 2004년 51.9에서 2005년 50.9로 악화됐다. 현재 직장내 사회보험(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 가입률은 정규직 83%, 비정규직 31.3%다. 이들의 열악한 처우와 고용불안은 극단적 투쟁으로 나타난다. 최근 격렬했던 노동쟁의가 대부분 출구없는 비정규직들에 의한 것이다. 참여정부 들어 크레인 점거와 한강 투신, 방화를 낳은 화물트럭·하이닉스·포스코 사태가 그 예이다. 비정규직이 고통을 받는 사이 그 해법의 주체인 노·사·정은 상황을 악화시켰을 뿐이다. 참여정부 노사개혁 TF팀장을 맡았던 박태주 한국노동연구원 교수는 "양극화 핵심은 비정규직"이라며 "그런데 정면으로 부딪쳐서 정책적으로 성과를 낸 게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시급하고 심리적 초조감은 컸지만, 장관마다 성과주의에 집착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언행불일치는 지난해 비정규직 비율이 40.8%까지 올라선 공공서비스업이 단적인 예이다. 참여정부 정책기획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고려대 김유선 교수(아세아문제연구소 노동대학원)는 "비정규직의 눈물을 씻어주겠다고 공약한 노무현 대통령이 '차별해소도 좋지만 수십조원이 든다'는 금융경제연구원의 박사 논문 하나에 '차별은 인정하고 남용을 막는' 쪽으로 방향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그는 "입법 과정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이 무너진 게 그 씨앗"이라고 진단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은 "문제의 본질은 알지만 노동 진영도 대안과 행동은 미치지 못했다"고 진보세력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그때 그때 문제를 키우지 않도록 성과주의로 접근하다 보니 문제를 피하게 됐다"면서 "그 때문에 비정규직의 50%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찍게 됐다"고 자성했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민주노총이 대기업 노조, 대기업 비정규직 문제에 집착하면서 더 소외된 비정규직을 부차적 사안으로 여기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실제 민주노총은 본지 취재팀이 최근 '비정규직 실태 자료'를 문의했을 때 "정리된 자료가 없다"며 한 대학교수를 소개했다. 아직 종합적인 실태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서민의 궁핍과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는 것은 부동산·사교육비·의료비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후 7~8개월간 지역에 따라 40~50%까지 폭락한 부동산값은 국민의정부 후반에 일어난 건설경기·주택규제 완화의 붐을 타고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 주범이다.

95년 집을 팔고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98년 봄에 돌아온 김모씨(42·갈비집 운영)는 다시 옛날에 살던 서울 신천동의 이웃 아파트를 사며 4배 가까이 부(富)가 증가했다. 환율은 그 사이 2배로 뛰고, 예전의 신천동 집값은 반토막 가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외환위기와 인생의 운때가 맞은 행운아"라고 한다. 반대로 이동통신사 서비스점에서 일하는 박모씨(28·여·상담직)는 "매달 1백30만원 월급에 비정규직(배달업)인 남편(31) 월급을 합쳐도 가족 수입이 2백80만원 수준"이라며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세살배기 아들의 양육비와 생활비, 승용차 월부금, 비과세 적금에 들어가면 빠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4천5백만원짜리 다세대 전세를 살며 청약저축도 들고 있지만, 지금 우리로선 당장 판교 아파트가 당첨돼도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되팔기 전에는 분양 대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부동산 규제 정책을 쏟아낸 참여정부에서도 지난 5월 기준 전국 부동산값은 2003년 대비 7.7%가 급등했다. 서울 강남은 23.9%, 광역시는 11.2% 올랐다. DJ정부의 정책 참모였던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99년 2천조원 정도이던 부동산 시가총액이 지금 4천조원을 넘었다. 2천조원이 땅없는 사람에게서 땅있는 사람에게로 넘어간 것"이라며 "역재분배가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집권한 민주세력 집권의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전모씨(35·언론인)도 "지난 3·30 부동산대책이 서민부터 울렸다"고 했다. 그는 "지난 7월 평촌에서 전셋집을 구할 때 1주일마다 5백만~1천만원씩 올라 전쟁을 치렀다"며 "서울 강남 집주인들이 세부담을 전셋값에 얹으며, 세입자들이 비강남·신도시로 도미노처럼 밀리고 있다"는 중개업소의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는 "보유세 강화가 징벌적 세금이 아니라 부동산 보유자라면 마땅히 납부할 '좋은 세금'임을 알리는 게 선진국의 추세이고,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입을 모은 궁극적 방향"이라며 "보유세는 증세정책의 하나처럼 착시가 일어났고, 그나마 일관성과 구체적 목표를 상실한 정부의 정책 집행방식이 혼란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8월 임시국회때) 주택 재산세의 연간 상승률을 3억원 이하 5%, 3억~6억원은 10%로 제한했지만, 실제 전국 공동주택에서 6억원 이상은 1.6%, 3억~6억원은 5.2%에 불과하다"며 "서울·수도권을 제외하면 3억원 이하 주택이 10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세 경감의 초점은 1억~2억원대 서민주택에 집중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교육비 부담도 중산층과 서민들에겐 힘겨운 '눈물 바구니'다. 이모씨(42·방송국 일반직·연봉 4천5백만원)는 지난 5월 2억원이던 강남구 신사동의 전셋집을 빼 성북구 동소문동으로 옮겼다. 중학교 1학년·초등학교 4학년인 남매의 사교육비 때문이다. 강남에서 영어·수학·논술 학원 과외를 받는 큰 아들과 글짓기 학원과 가정학습지를 하던 둘째 딸에게 들어가던 사교육비는 월 1백30만원 정도.

둘째 딸이 "나도 영어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해 "시켜주마"라고 약속하고 조금 싼 전셋집을 찾은 것이다. 이씨는 "학교 내신이 중요해진다는 데 상대적인 궁핍을 느끼며 강남에서 버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며 "다만 '돈 때문에' '애들을 사교육 시장에서 키워야 되는 현실 때문에' 돌이킬 때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가계의 사교육비 지출은 19조2천4백억원으로 전체 교육비의 반을 차지했다. 특히 대학들이 논술형 고사 도입 방침을 밝힌 2004년 이후 개인교습비(현직 교수·교사외 양성화된 사교육)는 5조원을 웃도는 급증세다. 2003년 31만원이던 가구당 개인교습비는 지난해 41만6천원으로 늘었다.

전국 가구당 평균치이지만, 저소득 가정이 늘어나고 지방의 부족한 여건을 감안하면 사교육의 양극화는 통계수치의 숫자를 무색케 한다. "부유층·중상위층에서 확대되는 고액과외는 제대로 소득파악이 안된다"(교육 당국자)는 실토다.

고려대 김경근 교수(교육학)가 지난해 분석한 부모 직업별 수능성적은 '전문직·관리직 324점, 일반기술직·사무직 304점, 판매·서비스직 300점, 생산·기능직 289점'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소득수준별 수능성적도 5백만원 초과때 317.6점이고, 2백만원 이하는 287.7점이다. 민주세력 집권이 거듭되면서 교육양극화가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안전망과 최저 복지제도의 한 척도인 의료비도 2003년 현재 본인 부담 비율 41%(OECD 평균 18.3%), 공공지출 44%(OECD 72.2%)로 대비된다.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체납가구수가 1백70만가구를 넘는 열악한 추세다. 돈이 없으면 병원을 찾지 않는 서민들의 실생활을 보여주는 수치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사회경제적 삶'의 민주주의가 확장되지 못하고, 빈곤과 실업을 개인의 실패로 모는 신자유주의에 함몰되며, 오히려 민주화된 정치구조에서 계급사회가 심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취업이 빈곤탈출의 청신호였던 시절은 지나갔고, 시장 탈락자에 대한 복지부담은 계속 커지는 상황"(고려대 고세훈 교수)이란 진단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 1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조사는 단적으로 소통의 문제를 짚는다. 여론조사에서 '세금 덜 내고 개인소득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 55%였지만, '더 많은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엔 52.6%가 찬성했다. 일부 희생이 있더라도 사회 전체의 복지 확대에 대해서는 여론이 우호적인 셈이다. 당초 "1% 더 내면 10%를 더 돌려준다"며 시작된 양극화 재원 논쟁이 증세·감세 논쟁만 반복하며 겉돌았다는 복기(復棋)인 셈이다.

이런 성적표는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신뢰의 위기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올해 '국내 24개 파워집단'의 영향력과 신뢰도를 조사했을 때(10점 척도), 청와대·참여연대·민변·민주노총은 모두 5점 이하로 나타났다. 지난해보다 상승한 것은 민변뿐이고, 열린우리당은 영향력·신뢰도 모두 최하위를 기록했다. 진보·개혁 세력의 신뢰도 하락은 KSOI가 지난 6월 실시한 사회단체 정기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표 참조). '신뢰한다'는 답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41.5%), 민주노총(25.6%), 전경련(24.6%), 전교조(22.5%) 순이지만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은 각 단체별로 52.6~70.9%로 신뢰도를 압도했다.

1990년대 개혁의 동력이었던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불신의 골이 그만큼 커졌다는 징표다. 참여정부 주요 부처의 신뢰도 역시 경제팀(12.6%), 교육팀(13.1%), 통일외교팀(23.8%)으로 출범 직후인 2003년 6월에 비해 급락했음을 보여준다. 김정수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사무처장은 "과거처럼 시민단체들의 상대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파트너가 아니다"라며 "기관장 앞에서는 큰소리 치고 6급 주사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게 시민단체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집권세력만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진보정당이나 진보세력들은 대안 없는 반대로 할 일을 다 한 양 손을 놓았고, 진보적 비전으로 시민들의 힘을 모으지도 못하고, 이 사회의 담론을 지배하며 의제를 이끌어가지도 못했다. 시민들의 삶이 추락하는 동안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너도 나도 나섰던 그 많은 진보개혁세력들은 다 어디로 갔나.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후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민주화운동의 훈장을 떼겠다. 밥이 하늘이다"라고 했다. 너무 늦었다. 권영길 민노당 의원단 대표는 "대중의 피부에 와닿는 생활정치를 펴겠다"고 했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본지 취재팀에게 고백했다. "화려한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80년대 민주화, 90년대 개혁으로 진보개혁 진영이 담론을 주도했지만, 2000년대는 그것을 상실했다."

〈이기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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