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속사상] '로봇'이 선거권 달라면 어쩌나/장대익

2006. 10. 2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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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술 속 사상/(26)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2004년에 개봉된 윌 스미스 주연의 <아이 로봇 i, Robot> 속으로 들어가보자. 2035년 어느 날, 시카고 경찰 스프너(윌 스미스 분)는 로봇 모델 NS-5를 창조한 래닝 박사의 살인용의자로 '써니'라 불리는 로봇을 체포한다. 취조실에 앉아있는 써니 앞에서 스프너는 상관에게 '윙크'를 하며 들어온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지켜본 써니는 그 윙크가 무엇을 의미하냐고 다그치지만 스프너는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린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물론, 영화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무안하게도 써니가 감정을 진화시킨 최초의 로봇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스프너의 목숨을 살린 것은 써니가 배운 그 윙크였다.

윌 스미스에게 윙크하던 '써니'

하지만 감정이라니! 그것은 인류의 지성사에서 거의 언제나 이성의 적이지 않았던가? 실제로,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감정이 인공지능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독특성을 인지능력(전통적 의미에서 이성)에서 찾았으며 그 능력은 감정과 거의 언제나 길항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전제했다. "이성을 잃었다"는 그래서 나온 부정적 표현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잠시 짐승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정을 잃었다"는 표현은 쓰지 않으며 게다가 감정을 잃었다고 해서 짐승(혹은 로봇) 취급을 당하지도 않는다. 감정은 동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키워드일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감정에 대한 인지과학적 연구들로 인해 기존의 관념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예컨대 감정을 담당하는 안와전두엽 피질에 손상이 생기면 이성적 판단도 함께 흐려진다는 결과가 보고되는 등, '이성 대 감정'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이 재고되기 시작했으며, 감정 교류가 가능한 '사회 로봇(sociable robot)'을 만드는 일이 인공지능 로봇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아이 로봇>외에도 최근의 <에이 아이>, <바이센테니얼 맨>, 그리고 고전적인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영화들은 이미 감정과 의식을 가진 로봇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영화 속에서 로봇은 우리 인간과 감정적 교감을 나누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여느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이다.

현실의 로봇은 어떤가? 우리는 혼다의 아시모와 KAIST의 휴보가 인간과 똑같은 운동능력을 가지도록 진화한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운동신경이 발달한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것을 구현하는 과제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 채팅을 통해 재밌는 대화를 나눈 상대방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고 하면 우리는 깜짝 놀란다. 즉 의사소통, 혹은 감정교감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대상에게 단지 '기계'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로봇 연구의 메카로 알려져 있는 MIT 미디어랩의 몇몇 실험실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감정을 '읽고' 그에 맞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로봇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가령 아이들의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는 로봇이 있다. 이 로봇은 아이에게 문제를 내주고 풀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아이가 계속 틀리거나 막혀도 "땡! 다시 시도해 보세요."라고만 하지 않는다. 대신 "나도 이런 문제가 나오면 너무 화가 나. 잠시 만화 좀 보다가 다시 해볼까?"라고 대답한다. 그 로봇에게는 아이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어서 그가 화가 났는지, 긴장하고 있는지, 지겨워하는지, 흥미로워하는지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 로봇의 궁극적 목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자폐증 환자를 돕는 것이다.

로봇이 부적절한 대우 느낄 수도

이와 비슷한 로봇인 '키즈멧(Kismet)'은 상대방의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시선, 몸동작, 말을 분석하여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또한 '리플리(repley)'라는 로봇은 바이센테니얼 맨의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로봇 연구의 뒤에는 전자 및 기계공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발달심리학, 인지심리학, 컴퓨터과학, 동물행동학 등이 매우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로봇이 진정으로 감정을 얻게 되는 날은 동물, 인간, 기계가 한 직선 위에 올려지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로봇은 자신이 (부)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까지 갖게 될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심각하게 묻는 로봇이 생겨날 수도 있다. 똑같은 모델로 양산되었다는 사실 앞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로봇도 있을 것이다. <에이 아이>의 데이빗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영화 <애니 매트릭스>에서처럼 로봇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인간과의 공존을 희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들에게 선거권을 줘야 하는가? 그들을 위한 노동법을 만들어줘야 하는가?

혹자는 이런 질문들이 SF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과 20-30년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권리'라는 단어에 대해 황당함을 느꼈는지를 떠올려 보자. 동물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이 쌓이면서 우리는 이제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느낌이 우리와 교감하는 동물에 대해서만 작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우리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로봇이 생기면 우리는 틀림없이 훨씬 더 심각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동물들보다 대화가 가능한 로봇들이 우리의 정서에 더 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사이보그엔 정체성 물음 뒤따라

한편 인간을 닮은 로봇, 즉 '휴머노이드(humanoid)'를 만들려는 인간의 꿈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또 다른 욕망이 있다. 그것은 로봇을 닮은 인간, 즉 '사이보그(cyborg)'가 되려는 욕망이다. 사이보그는 짧은 유통기한을 가진 신체의 여러 부분들을 그렇지 않은 기계 및 전자 장치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생긴 산물이다.

몇 달 전 저명한 과학 전문지 <네이처>는 뇌에 칩을 이식한 20대 척수마비 환자(매튜 네이글)의 사진을 표지로 올렸다. 그는 '뇌-컴퓨터 연결장치(BCI)'를 개발하는 한 회사로부터 '브레인케이트'라는 칩을 운동 피질에 이식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자 신호로 다른 컴퓨터에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전달된 신호를 통해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도 뭔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 실험은 몇 년 전 원숭이에게 신경칩을 심어 원숭이의 생각만으로도 로봇 팔을 움직이게 하는 실험보다 한 단계 진보한 것이었다.

사실, 사이보그는 주로 손, 팔, 다리, 심장, 망막 등 이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신체 기관들에 대해 인공 보철물을 만드는 식으로 진화해왔다. 가령, 심장에 문제가 많은 사람에게 튼튼하고 수명이 긴 인공 심장을 이식함으로써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매튜의 사례에서처럼 뇌의 부분에 직접적으로 인공물을 삽입하는 사이보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뇌에 신경칩을 이식받은 매튜는 아직은 매튜이다. 즉, 그 칩은 매튜의 두뇌가 하는 일을 돕는 보조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수천, 수만 개의 그런 신경칩이 뇌 속에 이식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뇌의 생체조직이 오히려 그 칩들의 보조장치가 되는 때가 온다고 해보자. 그 때도 우리는 그 사이보그를 매튜라고 불러야 하는가?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려는 욕망 뒤에는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뒤따른다.

사이보그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오면 인류는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이보그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를 문자 그대로 기계부품처럼 취급하게 되면 온갖 형태의 하이브리드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신체를 중성화해 성별을 없앤 사이보그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모두 기계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수십 만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우리의 뇌와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SF에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까지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언젠가는 그들과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체세포 복제술과 줄기세포 연구 등은 불과 10년 전만해도 소수의 생명공학자들에게만 쟁점이 되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공학에 대한 사회윤리적 쟁점들이 대학 입시 문제에 단골이 되었을 정도로 당면한 과제가 되었다.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에 대한 연구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바로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로봇 윤리학을 학교에서 배워야만 할지도 모른다. 옆 자리의 사이보그와 함께?

장대익/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방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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