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한' 서린 절창 '여자 조용필'로

2006. 8. 2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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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만으로 노래 전체를 압축적으로 상징해 주는 경우가 왕왕 있다. 노래 제목이 가사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오늘 글의 주인공인 김수희의 "멍에"(추세호 작사?작곡)가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멍에. 다른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야속하고 한스러운 운명을 말한다. <멍에>는 사전심의 과정에서 네 번이 반려되었다는 사연도 함께 가지고 있다. 곡에 표현된 한 많은 사연만큼이나 곡 자체가 빛을 보는 과정에도 사연이 많았다.

<멍에>는 1982년 발표된 뒤 해를 넘기면서 히트를 넘어 홈런을 기록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던 이 곡이 아직 기억의 저장 장치에 남아 있다면, 잇다가 끊고 다시 이으면서 길게 흐느끼는 듯한 가수 특유의 발군의 창법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내게은 소중했더어어어어언"으로 들리는 절정부, 그리고 "마음이 괴로울 때며어어어언"으로 들리는 종결부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이 창법에서 표현되는 감정을 말로 적절히 표현하기는 힘들다. 이 감정은 어떤 감정일까.

강준만은 최근 모 주간지에 실린 기사에서 <멍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을 하곤 했던 강남 여인들의 제1순위 단골 레퍼토리로 떠올랐고, 이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남성 고객들의 애창곡으로까지 발전했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강남 여인들'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고, 나 역시 공식적 지면에서는 별다른 대안적 표현을 발견할 수 없는 특정 시대 형성된 특정 집단에 대해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가수와 작곡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집단의 정서가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에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몇 년 뒤 본인이 직접 작사한 <서울여자>(김기표 작곡, 1990) 에서 "사랑도 팔고 사는,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는 표현은 그녀의 연민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었다.

<멍에>가 김수희의 데뷔작은 아니다. 광주에서 상경한 뒤 1970년대 중반부터 미8군 무대와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1970년대 말 발표한 음반에 수록된 <너무합니다>(윤향기 작사?작곡), <남포동 블루스>(신상호 작사?작곡) 등을 조금씩 알리고 있었다. <너무합니다>에 대해 "록 창법을 목이 메는 듯한 질감으로 소화하여, 퇴행적 비극성의 질감으로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평한 가요평론가 이영미의 발언은 그녀의 고된 경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해 준다. 그것이 '퇴행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평론가 뿐만 아니라 청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어쨌거나 김수희의 노래를 예술로 존경하는 사람은 드물었겠지만, 그녀의 곡의 호소력은 특정 공간의 특정 집단에 머무르지 않을 정도로 광범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사연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보편적인 것이라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너무 합니다>와 <멍에>에 뒤이어 <못 있겠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줘요>, <남행열차>, <마지막 포옹>, <님>(고 김정호 곡의 리메이크) 등이 크고 작은 히트를 기록했고, 그 결과 그녀에게는 '한때 여자 조용필'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 호칭은 아마도 야간업소에서의 유흥을 배경으로 하는 듯한 사운드에 한을 응축한 듯한 절창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수희의 지위가 조용필만큼 오랫 동안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김수희는 인기가 쇠락해 보이던 1993~4년 경 "애모"(유영건 작사?작곡)를 히트시키면서 10년만에 두 번째 홈런을 날린다. 1990년에 자신이 설립한 희레코드를 통해 발표된 이 곡은 한동안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지각 히트한 곡이었다. 1993~4년이라면 '신세대 댄스가요'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라서, 가요평론가들과 신문기자들은 "한쪽으로 종횡무진 달려가는 획일적 댄스 문화에 일침을 가했다"는 식의 평을 쓰는 훌륭한 소재를 공급했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는 '성인의 유흥'의 대중화가 진행된 시대다. 이렇게 대중화된 성인의 유흥문화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우호적이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나름대로 절실했고 그 절실함이 때로는 도덕이라는 '멍에'를 넘어섰던 것은 아닐까. <멍에>가 히트할 무렵, 강제징집을 당해 전방무대에서 박박 기던 필자로서는, 김수희의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던 '군바리'들이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는데, 입대한 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자'를 몸부림치면서 원망하고 또 그리워하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어설프게 감정이입해 볼 뿐이지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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