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괴물이 불러낸 삐딱한 독해 '가족'

2006. 8. 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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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라틴어로는 몬스트룸, '징후' 혹은 '경고'라는 뜻이다. 괴물에서 '괴'의 뜻은 인간의 경험으로는 그 원인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실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이제 영화를 넘어 사회적 이벤트가 되어가고 있다. 원인을 설명해야 할 현실이 되었다. 그 이벤트와 과잉 현실은 분명 말 그대로 몬스트룸, 어떤 징후로 보인다. 그 몇개의 징후를 짚어보려 한다.

1. 첫 번째 몬스트룸:포스트- 냉전과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사회에서 '괴물'을 처음 보았고,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한번 더 보았다. 주말의 극장,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많이 보였다. 열대야를 피해 극장으로 온 듯, 상당수의 사람들이 반바지 차림이다. 시사회에선 놀라는 반응보다 웃는 빈도가 더 잦았다. 주말 극장에선 의외로 별 반응이 없었다. 이제 웬만한 공포영화의 놀래주기 음향 장치에 익숙해진 듯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한 꼬마 아이가 극장을 나가면서 "재밌다!"라고 탄성을 질렀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 소리에 흡족한 표정이다. 괴물을 가족영화라고 본다면 좋은 반응인 셈이다. 이때가 새벽 1시 반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멀티플렉스의 2개관에서는 '괴물'을 심야상영을 하고 있다. 국내 스크린 수 1,648개 가운데 620개를 장악하고 있어 작은 영화들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어간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만하다. '괴물'이 영화계의 배급 관행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사실 이 영화 텍스트의 구성 자체는 현재 '괴물'이 일으키는 파장에 걸맞은 '괴물'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군이 한강에 대량 투입한 포름알데히드가 괴물을 낳는다는 설정은, 이론의 여지없이 해방 이후 이제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탄생시킨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힌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왜 그렇게 군대나 경찰이 무력화되어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는 '살인의 추억' 때와 유사하게 사건 해결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방해를 일삼는 경찰과 군인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들이 사투를 벌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 부분을 짚지 못할 바는 아니나 한국 군사력이 과소평가되어 재현되었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현대전에 대비한 그 각종 무기들은 다 어디로 가고 괴물과 결전 한번 벌이지 못한다. 수색 헬기 한번 제대로 뜨지 않는다. 그 결과 이러한 군대와 경찰의 부재가 '살인의 추억' 때처럼 사회적 무능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가족드라마로 가기 위한 영화적 장치로 보일 뿐이다. 괴물이라는 알레고리와 가족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는 정치적 복합성이 희박해진 것이다. 또, 영화의 논리로 따지자면 한강의 다른 물고기와 크기나 먹성이 전혀 다른 괴물이 탄생한 것은 미국 탓이니, 그 괴물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그러나 영화에서 괴물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괴물 영화에서 괴물의 형상화는 시대적, 사회적 무의식이 투사된 경우가 많다. 예컨대, 서구로 보자면 도래하는 근대에 대한 맹신과 공포라는 양가적 감정이 낳은 괴물이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다. 또, 일본 핵폭 이후 등장한 괴물이 고질라이며, 김기덕 감독의 '대괴수 용가리'(1967)는 비무장지대에서 출현한 냉전시대의 괴이한 용이다. '괴물'에 등장하는 겁없는 '대형 민물 생선'은 세계적 포스트 -냉전 시기에도 여전히 미군기지와 냉전이 잔존하는 한국이 탄생시킨 괴물이다.

이들은 맹목적 공격성을 가지고 탐식한다. 이렇게 시대적 공포가 투사되다 보니 괴물영화에는 곧잘 짝패가 등장하거나 그 괴물을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사회적 타자나 소수자가 존재하게 된다, 예의 대괴수 용가리에서 그는 소년이며, '오페라의 유령'의 '괴물'과 여자는 서로의 주변성을 알아본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의 짝패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상에서 사회 적응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딸을 잃은 이후에도 생체를 조정하는 의료 권력에 의해 괴롭힘 당하는 강두일 것이다.

실제로 강두가 손님이 주문한 오징어 다리를 뜯어 먹고, 금식지시를 깨고 골뱅이를 먹을 때 괴물과의 유사성은 환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타자들간의 유사성이 가져올 수 있는 어떤 조치는 취해지지 않는다. 예컨대 강두가 괴물의 생태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퇴치법을 발명한다거나 아니면 괴물을 안전한 다른 곳으로 보낸다든지 하는 등의 설정 말이다.

영화 '괴물'을 할리우드의 다른 괴물 블록버스터 영화, 최근의 '우주전쟁'이나 '킹콩' 등과 비교했을 때 흥미로운 점은 그 전선이 확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리우드발 괴물 영화들은 '우주전쟁'에서 보듯이 우주에서 날아와 지하에 잠복해 있다가 전 미국대륙을 휩쓴다. 그들은 전진하고 초토화하고 확장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영토로 식민화하고 제국화하려 한다. '킹콩'은 어떤가? 저멀리 해골섬에서 끌려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서게 된다. 그러나 '괴물'에서 괴물과 여타 인물들은 한강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강 둔치, 원효대교, 교각과 교각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닐 뿐이다. 이러한 괴물과 인물들이 놓인 한계 공간이 세계적인 포스트 냉전 시기에도 꼼짝없이 냉전을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치러내고 있는 한국의 상황, 지정학적 봉쇄와 관련 없다고 보기 힘들다.

'괴물'에서 괴물은 증식도 하지 않으며, 재생산할 만한 대상도 없고, 더구나 다른 재앙영화처럼 닥치는 대로 부수지도 않는다. 보통 괴물 영화에 동반되는 대규모 파괴장면이 이 영화엔 없다. 오히려 괴물은 원효대교 건축물을 잘 이용해 자신의 먹이 저장고까지 만든다. 이 괴물은 예컨대 펠리컨처럼 축적형이다. 순간 쾌락 충족형이라기보다는 미래 대비형인 것이다. 괴물의 이러한 반 확장적이며, 축적 지향적 특성은 앞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제작의 준거 틀이 될 듯하다. 즉,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거두어들일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효율성에 입각해 폭발물, 블록버스터를 파괴장면을 최대한 줄이면서 꾸려내는 것 말이다.

2. 두 번째 몬스트룸:아버지의 가족

영화 텍스트의 자기 완결성을 넘어서는 효과, 수용적 측면에서 괴물은 흥미로운 영화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최단기에 경신하고 있으나, '태극기 휘날리며'나 '한반도'와 같은 우파 보수 블록버스터는 아니다. 오히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포스트 냉전의 증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포스터에 명백히 써있다시피 무엇보다도 가족영화다. 그것도 잘 기능하지 않는 가족들이다. 불화의 원인은 아들 세대로부터 기인한다. 첫째 아들 강두(송강호)는 아버지(변희봉)가 운영하는 매점을 지키기는 하지만, 낮잠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거나 오징어 다리를 노린다. 딸 현서(고아성)를 애지중지하기는 하지만, 아이의 수업 참관에도 동생(박해일)을 보내야 할 만큼 사회 적응력이 떨어진다. 그런가 하면 그 동생은 운동권 출신으로 직장을 못구해 술병을 끼고 사는 수준이다. 현서는 '강두가 사고쳐서 낳은 딸'이고, 생모는 아이를 낳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하는 아버지는 소위 살림하는 여자라곤 없는 3세대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 음식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난 후 매점으로 돌아와 그는 가족들에게 컵라면을 건넨다. 판타스틱 장르지만 괴물을 포함하는 장면을 제외하곤 비교적 현실법칙에 근사해 장면을 구사하는 이 영화의 관행상 다른 부분들과 차이나는 장면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즉, 빙 둘러앉아 라면과 김밥 등속을 먹는 가족들 뒤로 현서가 슬그머니 나타나 김밥을 집어먹는 것이다. 강두가 먼저 알아채 계란을 집어준다. 이 영화에서 식구는 말 그대로 끼니를 나눌 때 식구가 된다. 그러나 역설적 사실은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식구가 되는 그 순간이 현실이 아닌 심리적 원칙에 기댄 환상장면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합동 분향소 장면에서 아버지가 극적으로 언급하듯이, 가족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인 것은 현서의 죽음 때문이다. 괴물이 가족을 모이게 한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 상상의 산물인 괴물과 대조를 이루는 가장 현실적 단위인 가족의 결집력은 괴물에 의해 촉발되고 재구성되는 그 무엇이지, 자족적이며 자명한 단위는 아닌 것이다. 또한 재구성된 가족 역시 2세대의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핵가족이 아니다. '괴물'이 불러내는 동시대 가족에 대한 비딱하면서도 관용적 정치적 독해는 바로 그 부분이다.

이러한 기우뚱한 가족의 가부장인 소상인이며 소시민인 아버지는 사회적 적응력이 떨어지는 두 아들을 권위적으로 호통치는 대신 유머마저 가미된 관용으로 감싸안는다. 아버지 역을 맡은 변희봉은 삶의 농익은 지혜가 드러나는 역할을 정말 실감나게 잘 연기해낸다.

이러한 아버지는 그러나 강두가 남은 총탄 숫자를 세는 것을 잘못해 가장 먼저 괴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보살피던 아들의 실수로 아버지가 죽는 것인데,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막 활을 쏘려는 신궁인 딸에게 피하라고 경고한다. 또 강두에게도 피하라는 손짓을 보낸다. 그래서 꼼짝없이 혼자 괴물과 마주해 죽어간다.

이렇게 희생적인 아버지가 있는 반면, 강두의 어머니도 영화에선 부재하고 강두의 처, 현서의 어머니도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현서의 고모(배두나)는 수원시청 소속의 양궁선수라, 집안을 돌볼 겨를이 없다. 영화에서 돌봄 노동은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온전히 그의 것이다.

이러한 한 부모 가정이지만 나름대로 대가족 제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속에서 자라난 현서는 명랑하고 용감한 소녀다. 그리고 막상 괴물에 포획되어 갔을 때 자신보다 어린 소년을 정성껏 돌본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과 강두가 엇비슷한 짝패라고 한다면, 영화에서 돌보는 아버지상과 가장 닮아있는 인물은 현서다. 나는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돌봄이 다른 돌봄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구조가 그 자체 연쇄고리로 보자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젠더 정치학에서 보자면 좀 문제가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배두나가 맡았던 역이 보여주는 그 엉뚱한 정의감 넘치는 질주와 너무나 대조적으로 '살인의 추억'에서 대부분의 여자는 성폭행을 당한 채 수로에 버려져있다. '괴물'에서 어머니란 존재는 부재하며 은연중 그녀의 부재는 문책된다. 결국 소녀 현서는 죽고 강두는 현서와 함께 있었던 남자아이를 돌본다. 몇몇 네티즌들은 '살인의 추억'과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괴물'은 미군장갑차에 희생된 미순과 효순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과잉해석만은 아니다.

현서가 괴물에 의해 납치되었지만 가족도 군인이나 경찰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는 점이 그러한 연상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3. 세번째 몬스트룸:'괴물' 한국 영화 맞나?

개봉 1주일이 지난 지금 이제 '괴물'이 불러내는 화제는 얼마나 빨리 다른 영화보다 1천만 관객 돌파를 이루어내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숫자가 숫자를 급속도로 증식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금융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치의 논리이기도 하다. 즉 신자유주의 시장에 맞는 블록버스터와 그 와중에 틈새를 노린 작은 영화들만이 그럭저럭 살아남고 중간급 영화는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해있다. '괴물'은 위와 같은 정황의 산물이지, 원인 제공자는 아니기 때문에 사실 이 영화가 위와 같은 논리로 질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괴물' 흥행을 계기로 영화배급과 상영의 불공정한 규칙들을 전면적으로 개정할 필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괴물'의 이러한 전례 없는 흥행 돌풍 이유는 물론 위의 정치적 무의식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름이 워낙 블록버스터 영화의 계절로 관람 관행이 형성되어 왔고 '괴물'과 견줄 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없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의 시즌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블록버스터라는 조건들 외에 '괴물'의 대중적 매력은 바로 괴물 자체의 완성도에 있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컴퓨터 그래픽 작업에 안심하고 환호하는 것이다. '시네21'에 실린 '괴물 속 괴물 제작 과정'에 따르면 "매켓"이라는 3차원 모형과 "3D 스캔용 매켓"을 뉴질랜드의 웨타 워크숍과 미국의 오퍼니지에서 했다고 한다. 크리처 디자이너 장희철과 봉준호 감독의 창의적인 괴물 형상화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블록버스터의 중요한 요건인 자본과 스펙터클 중 이제까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해결하지 못했던 컴퓨터 그래픽에 힘입은 스펙터클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이 일정하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 1998년의 '퇴마록' 즈음이다. 봉준호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로도 참여했던 1999년의 또다른 한국형 블록버스터 '유령'은 영화 홍보의 상당 부분을 유령이라는 잠수함의 구축과 CG 작업에 할애했다. 그럴 듯한 컴퓨터 그래픽의 완성은 이렇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오랜 꿈이었으나 사실 '괴물'에 와서 일정한 수준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영웅'과 같은 중국 블록버스터도 마찬가지지만 이즘 이와 같은 CG 블록버스터들의 스태프들은 영화의 국적과 관계없이 미국 CG 회사를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웅'의 크레딧의 시각 효과에는 '물랭 루즈' 등을 만든 팀이 올라와있다. '괴물'의 크레딧에도 예의 뉴질랜드와 미국의 시각효과팀이 등장한다. 봉준호 감독 팀이 분명 성공적인 CG 괴물을 탄생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괴물에서의 기술적 성취가 한국 기술력의 독점적인 일취월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한국에서도 이제 번듯한 스펙터클이 나온 것에 만족감과 일치감을 느낀다. 이제 다국적 영화 제작방식은 전세계적 관행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방식의 결과물을 민족적 자긍심으로 수렴하는 것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만들어낸 홍보 방식과 '기술이 국력이다'를 외쳐온 70년대식 기술 결정론적 국가주의에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다. 이것이 영화 '괴물' CG의 성취를 반기는 데서 읽을 수 있는 세번째 징후, 괴물성이다. 11일 만에 6백만명이라니….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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