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만큼 힘든 장마철'..쪽방촌의 하루

2006. 7. 1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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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꿈도 못꾸는 독거노인 "이불빨래 최고선물"

(서울=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장마가 몰고 온 습기로 온 도시가 끈적이던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한 사람이 간신히 빠져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은 옆구리가 터진 쓰레기 봉투와 병자의 소변이 가득 담긴 페트병, 쪽방의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악취로 저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작은 미닫이문을 열고 홀로 사는 송현규(71) 할아버지의 반 평 짜리 쪽방.

창문 하나 없이 희미한 형광등에 의지한 방안은 한낮인데도 마치 초저녁처럼 어두컴컴했고 환기가 전혀 안돼 작은 선풍기 하나는 눅눅한 실내공기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그쳐 습기가 훤씬 덜한데 뭘. 며칠 전 큰비가 계속 내릴 때는 눅눅하기가 말도 못했다구…"

요즘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소형 텔레비전을 보며 소일하던 송 할아버지는 반짝 해가 난 것을 위안으로 삼는 듯 했다.

가족도 없이 정부에서 주는 30여만원 중 20만원을 월세로 내고 나머지 10여만원으로 한달을 산다는 송 할아버지는 "있는 사람들이야 에어컨이니 피서니 더위를 피하지만 우리들은 날씨로부터도 버림받았다"며 "선거 때면 유명 정치인들이 찾아와 사진만 찍고 갈뿐 변한 건 하나도 없다"고 섭섭해했다.

송 할아버지는 사람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뒤 기자에게 "어제 빨래방에서 이불을 빨아다 줘서 앉을 만 하다"며 이불 방석을 내놓았다.

샤워할 공간도 없어서 주인집 화장실 안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몸을 씻는 그에게 이불빨래는 꿈도 못 꾸는 `사치'였지만 종로구 자활후원기관인 한마음빨래방에서 2주일에 한 번 이불을 뽀송뽀송하게 빨아다 줘 잠자리가 한결 가뿐해졌다.

요즘처럼 습기가 많은 장마철엔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송씨 집에 들른 빨래방 사업단 윤인섭(61)ㆍ조길준(44)씨는 "쪽방촌에 주로 독거노인, 환자, 알코올 중독자가 많이 살다 보니 평소에도 대소변과 음식 쓰레기가 말라 붙은 이불이 여름엔 땀과 뒤범벅이 된다"며 "쪽방촌 사람들에겐 장마철은 겨울 만큼 힘들다"고 말했다.

이들은 "빨래 서비스를 신청하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을 다 없애고 원하는 이들에게 모두 빨래를 해주다 보니 하루에 세탁하는 이불이 30개나 된다"며 "많은 세탁량 때문에 세탁기가 다 망가져 수혜자 수를 줄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송 할아버지 집을 나선 윤씨와 조씨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창신3동 야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천막촌.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합판과 비닐 장막으로 얼기설기 겨우 집의 형태를 갖춘 주거지 십여채가 서로 낮은 어깨를 의지한 채 서 있었다.

대문 대신 두른 천막을 헤치고 나온 이옥형(88) 할머니는 "겨울은 추워서 싫지만 여름은 비 때매 못 살아. 엊그제 화장실 위 천막이 큰 비로 무너져 난리가 났었는데 오늘은 비가 그치니까 푹푹 쪄서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네"라며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29.2도, 불쾌지수는 대부분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불쾌감을 느낀다는 80을 넘은 이날 쪽방촌의 하루는 유난히 길어 보였다.

helloplu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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