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錄환경운동25년]온산병 사태(1) "우리 아아들만은 살리주이소!"

2006. 3. 16. 16: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온산공단 인근은 이미 '최악의 상황'… 언론 보도는 세간의 관심 비켜가고

잉크 냄새는 상쾌했다.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은 조간신문을 펼쳐놓고 숨을 들이켰다. 실내까지 스며든 새벽의 제법 찬 공기가 신문의 잉크 냄새에 뒤섞여 폐 속 깊은 곳을 간질였다. 벌써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거의 욀 정도로 보았는데도 그의 눈길은 또 다시 신문의 굵은 제목에 이끌렸다.

'온산공단 주변 어촌주민 500명 이타이이타이병 증세'

1985년 1월 18일자 한국일보 사회면에 보도된 이 기사가 환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가히 메가톤급이라고 할 만하다. 공해문제의 심각성을 국내에 처음 일깨웠을 뿐 아니라 나아가 국제적 관심사로까지 끌어올린 '온산병 파문'의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이를 예감이라도 한 듯 최열의 입가는 의미심장하게 일그러졌다.

> 만족스럽지 못한 '세계적 특종'

비슷한 시각, 한국일보 특집부 김주언 기자(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이 쓴 기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방판(초판)에서 사회면 톱이던 기사가 시내판에는 사이드톱으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아니었다.

"경남 온산공업단지 내 어촌부락 주민 500여 명이 팔·다리와 허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이름 모를 괴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 온산공업단지의 폐수가 흐르는 하천과 바다 주변에 사는 이들 어촌주민들 사이에 2~3년 전부터 집단발병한 이 괴질은 1950년대 일본에서 크게 사회문제가 됐던 중금속 카드뮴 중독에 의한 공해병인 '이타이이타이병'의 초기증세와 비슷해 역학조사를 서둘러 대비해야 할 것 같다…."

김 기자는 뒷날 나라를 뒤흔드는 '보도지침' 특종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언론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지만 원래 꿈은 전공을 살려 공해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 72학번인 그는 민청학련 사건에도 연루된 학생운동권 출신이었다. 그 바람에 군에 끌려갔다가 자연과학대로 복학해 졸업, 자연대 운동권 족보의 맨 꼭대기에 앉게 된다.

초임기자 시절 그의 별명은 '죠스'였다. 닥치는 대로 물고 일단 물면 놓지 않는 상어와 같은 기자정신을 빗대 출입처 동료기자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기사만큼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해문제에 관심 있는 자연과학 전공자의 눈으로 볼 때 온산에서 발병한 집단괴질을 '이타이이타이병'과 연결시키기에는 쑥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죠스 기자'의 입장에서도 역학조사를 통해 확인한 것도 아닌데 '증세'라고 표현한 것도 무리였다. 그는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 이런 약점을 감추기 위해 '초기증세와 비슷' 등의 말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는가 하면 역으로 '역학조사 서둘러야'라고 치고나간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염려는 당시의 공해문제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과 논의 수준, 사안의 심각성에 비추어 볼 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특종보도가 된 이 기사가 당시에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요인도 다른 데 있었다. 온산괴질을 취재한 김 기자와 사회부 이계성 기자(현 한국일보 논설위원)는 이 기사로 사내 특종상을 받지는 못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언론사의 특종 판단 기준은 다른 매체가 얼마나 해당 기사를 받아서 보도하느냐에 있다. 온산괴질 보도를 받아쓴 매체는 같은 날짜의 동아일보뿐이었던 것이다.

다른 매체가 받지 않은 까닭이 김 기자가 내심 걱정한 바처럼 객관적 근거자료 미비 때문인지 당시 노골적으로 이뤄진 정부의 언론통제 때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로부터 1년 7개월 후 김 기자가 '말'지 1986년 9월호를 통해 폭로한 보도지침에도 이 시기의 것은 포함돼 있지 않다. 최근 그는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공해문제는 평소에도 기사화가 잘 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행위로 받아들인 외부의 압박도 작용했던 듯하다. 공해문제를 다루는 것에 민감했던 그때 분위기로 봐서 기사를 받지 말라는 보도지침이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나도 그 이후로 후속기사를 쓰지 못했으니까…."

첫 '큰 사업' 대상지는 울산

다시 장면을 바꿔 서울 강동구 길동 삼익아파트. 최열은 들뜬 발걸음으로 출근 중이었다. 종로구 효제동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 사무실까지는 버스로 1시간여. 이날처럼 사무실이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와 다른 싸움, 아주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흥분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공문연 출범 후 공해 현장을 누빈 지 꼬박 3년. 이제야 운동의 지평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마당이 열린 것이다. 그는 어렵게 판을 성사시킨 김 기자에게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주언이가 해냈어.'

당시 온산공단 공해문제는 전문가나 관계자 사이에서는 새삼스러운 뉴스가 아니었다. 1974년 산업기지개발지역으로 고시되고 4년 후인 1978년 첫 가동에 들어가면서부터 온산 일대는 이미 크고 작은 공해 사건·사고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인 주민과 가해자인 기업, 그리고 정부 당국의 관심은 피해 보상과 주민 이주를 통한 해결에만 집중돼 있었다. 1982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집단괴질도 주민들은 그 이유를, 일반 국민은 그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웬만한 공해운동은 기사화가 잘 되지 않은 뿐더러 기사화되더라도 사회적 주목을 끌기 어려운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해문제를 전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했다. 공문연 비밀회원(?)으로 최열·정문화와 교감한 김 기자가 역학조사와 같은 객관적 근거 없이 공해병의 대명사인 '이타이이타이병 증세'로 치고나간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반공해운동의 가장 파급력 큰 소재는 공해병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일본에 공해문제가 부각된 것도 구마모토의 미나마타병, 니가타의 미나마타병, '요카이치 천식', 도야마의 이타이이타이병 등 이른바 '4대 공해병'에 힘입은 바 컸다.

상념에 젖어 있던 최열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앞차가 내뿜은 매연이 버스 안에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차창 밖으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산하게 걷는 출근길 시민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의 상념은 방금 맡은 매연보다 더 역겨운 냄새로 고통받는 울산·온산공단 지역을 달리고 있었다.

최열과 정문화(1998년 작고, '함께 사는 길' 편집장 역임)가 김 기자와 함께 위해 울산을 찾은 때는 공문연이 1년여 경험을 거쳐 본격적인 활동기반을 갖춘 직후인 1983년 2월 초였다. 울산을 첫 '큰 사업'의 대상지로 삼은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전진기지이자 중화학공업 임해공단의 효시로서 역사로 보나 규모로 보나 가장 심각한 공해문제를 안고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 기자는 정문화와는 서울문리대 운동권 선후배로 대학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다. 최열과도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잘 알고 지냈다. 그래서 공문연 출범 때부터 회원이자 후원자로서 관계를 맺어 회사 일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 차라리 서울이 공기가 맑다?

세 사람은 대한알루미늄 공장 등이 있는 삼산동과 영남화학 부근의 여천동, 조선비료 주변의 야음동의 공해가 가장 심각하다는 것 정도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직접 느끼는 공해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택시를 탔다.

"공해가 가장 심한 곳으로 갑시다."

"예? 아…?!"

택시가 멈춘 곳은 여천동이었다. 하지만 주민들과 대화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여기 공해가 심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말도 마이소!"라고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실태조사를 한답시고 외부에서 심심찮게 왔다 가지만 나아지는 게 없고 되레 이용만 당하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이들은 방법을 바꿔 주변의 구멍가게로 가서 맥주를 시켜놓고 주인에게 말을 붙였다.

"요즘 장사 잘 되지요?"

"장사는 무신…."

"공장들이 저렇게 잘 돌아가는데 장사가 안 된단 말입니까?"

"공장? 말도 마이소. 저거 때문에 몬 산다고 난린데."

이쯤 되면 거의 성공이다. 그는 옆에 있는 간이의자를 끌어내면서 말했다.

"거, 서 계시지만 말고 잔 하나 갖고 이리로 오쇼."

이들이 가게 주인을 비롯한 주민들을 통해 취재한 결과는 '한국의 공해지도'(공문연 엮음, 일월서각, 1986년)에 르포 형식으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곳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이 무렵 울산공단 주변은 이미 공해가 심각한 지경이었다. 경남 일대에 소문난 울산의 곡창이던 삼산평야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돼 있었다. "수확할 게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내기를 하는 것은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보상금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주민들의 얘기였다. 과수·채소농사도 마찬가지였다.

갈치는 처리를 다 못해 거름으로 썼다고 할 정도로 천혜의 어장이던 울산만은 사해로 변한 지 오래였다. 울산만 12개 어장 중 9개 어장이 폐장되고 북쪽 3개 어장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주민 고통도 심각했다. 남풍이 불면 석유화학 공장에서, 북풍이 불면 알루미늄 공장에서 각기 다른 냄새가 덮치는 식이었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냄새의 종류와 농도가 달랐다. 그럴 때면 눈이 아프거나 피부병이 생기는가 하면 목에서 피까지 나온다는 게 주민들의 호소였다.

공문연은 몇 차례 조사를 더한 뒤 피해 주민들을 서울로 불러 명동성당에서 사례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최열은 그때 울산의 한 농민이 말한 첫 마디를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서울에 오이 공기가 좋아 생기가 돕니더. 나무들도 다 살아 있네예."

당시 서울의 공기는 세계 20대 도시 중 최악이라는 조사가 나올 정도로 나쁜 상태였다. 그런데도 "서울 공기가 좋다"는 울산 농민의 말은 여러 차례 현지조사를 했던 그에게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충격적인 말을 듣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울산 바로 밑에 있는 온산이 훨씬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 실태조사에 나섰을 때였다.

공문연 활동일지를 보면 최열은 1984년 3월 7일부터 16일까지 경남 온산·마산공단과 부산 사상공단 실태조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공문연은 그해 12월 어민 중금속 중독 현황조사까지 적어도 10차례 이상 부산·울산·온산지역에 내려갔다.

온산공단이 다른 공단보다 늦게 조성됐는데도 가장 심각한 공해문제를 야기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군수산업 육성을 겨냥한 비철금속단지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최열이 처음 온산공단에 갔을 때 공장 주변의 철망에 붉은 글씨로 된 '위험! 접근하면 쏜다'는 섬뜩한 경고문을 보았다. 중금속 오염 우려가 가장 높은 공장들을 주민의 접근을 막아 성역처럼 보호한 것이다.

또 하나는 다른 공단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구 개발됐다는 점이다. 주거지역과 공업지역을 분리하지도 않은 채 1000만 평 가까운 지역을 지정해놓고 회사의 입맛에 따라 입주하게 한 것이다. 자연히 땅값이 싼 지역에만 공장이 들어서다 보니 주민 거주지 사이에 중금속 오염 위험이 높은 시설이 위치하는 경우가 생겼다. 동제련소의 컨베이어벨트가 주택가 위를 지나가는가 하면 온산초등학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연공장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처음 온산에 간 최열·정문화 등이 주민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학생들이 수업받다 쓰러지고 교정의 아름드리나무가 말라죽었다는 것이다. 최열은 이 정도만으로 머리칼이 설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 즉 '공해병'이었다.

공해에도 순서가 있다. 이를테면 울산지역 조사 때는 대나무가 제일 먼저 죽고 비교적 오래 살아남은 것이 배나무였다. 무·배추 등은 벼농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한참을 버텼다. 공해에 강한 작목이 살아남지 못할 때면 그 다음 차례는 사람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온산은….

최열은 현지조사 경험을 통해 해당 지역 공해의 성격을 가늠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먼저 약국에 가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두통약이면 공기에 문제가 있고, 모기약이면 쓰레기가 그 지역의 심각한 현안이다. 양복점·세탁소 등도 공해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연탄 공장의 분진 문제가 있는 지역에는 밝은 색 옷감이 잘 나가지 않는다. 그는 약국으로 달려갔다. 짐작한 대로 두통약이 가장 많이 팔린다는 게 약사의 설명이었다.

뼈마디가 아픈 온산 아이들

온산초등학교 교정은 황량했다. 화초는 찾아볼 수 없고 잎이 누렇게 변한 아름드리 은사시사철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아래 여자 어린이들이 천연덕스럽게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담임선생의 양해를 얻어 6학년 2반 교실에 들어간 그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린이 여러분 중에 뼈마디가 아프거나 피부병이 있거나 눈병을 앓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52명 가운데 딱 절반인 26명이 손을 들었다. 불길한 예감일수록 적중도가 높은 것일까. 주민들을 만날수록 '공해병'이라는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최열뿐 아니라 그 무렵 공문연에 가세한 대학생·청년 자원활동가들의 가슴을 송곳처럼 찌른 "우리 아아들만은 살리주이소"라는 말은 이때 나왔다. 바다의 오염 정도를 조사하기 위해 해녀들을 인터뷰할 때였다. 이곳 가난한 해녀들은 각종 어패류가 중금속에 심하게 오염된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채취해 먹기도 하고 내다팔기까지 했다. 이들에겐 건강보다 생존문제가 더 무서운 것이었다.

"몸도 안 좋고 건지는 거 션찮다 캐도 안 하고 몬 사는 기 우리 아입니껴. 우야마 좋십니껴. 국민핵교 댕기는 얼라도 빼마디가 쑤시고 아푸다 카는데. 선상님요, 내는 살만치 살았으이까네 우리 아아들만은 좀 살리주이소!"

기막힌 표정으로 듣고 있던 최열이 물었다.

"아주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는데 그러세요?"

"서른 여덟인데 와 그라능교?"

그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갑자기 나이를 잊어먹은 듯 그는 자신의 나이를 셈했다. 이제 우리나이로 37살, 그렇다면 바로 한 살 위 아닌가. 그런데 살 만큼 살았다니!

1984년 연말 공문연과 김 기자는 최종적으로 사인을 맞췄다. 공문연은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온산공단 피해어민을 상대로 중금속 중독 현황조사를 실시했다. 어민들의 혈액과 소변, 어패류, 폐수 등의 샘플을 채취해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일보 김 기자와 이 기자도 공식적인 출장취재에 나섰다.

이듬해 1월 7일 공문연은 한국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사선) 사무실에서 개신교·천주교·재야청년단체 실무자가 참석한 가운데 '온산공단 주민 집단괴질 발생에 대한 현황보고 및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간담회는 언론의 관심은 끌지 못했지만 시한폭탄이 되어 11일 후 김 기자에 의해 폭발했다.

'온산병 사태'를 세상에 끌어내놓기까지의 여정을 되짚고 있던 최열은 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 버스에서 내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미 공문연 사무실 앞에 닿아 있었다. 여정은 끝났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그보다 더 긴 새로운 여정이 펼쳐지고 있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