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6・25]최병구 일병 유족 추적기

2005. 6. 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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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주소지 탐문 취재를 통해 최병구 일병의 유족을 찾아나선다고 했을 때 주위 분위기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55주년을 맞아 전장에서 숨진 최 일병의 유족을 찾는다면 그의 혼백이나마 위로할 또 다른 의미의 ‘최 일병 구하기’가 아닐까? 공문(公文) 타령만하는 국방부 덕분에 오기도 발동했다.

한국전쟁 55주년을 10여일 앞둔 지난 12일 본격적으로 취재에 들어갔다. 부족하나마 최 일병의 신상정보를 확보했다. 소속, 군번, 주소, 유족(부 최만식), 입대・전사일이 나왔지만 가장 기초적인 생년월일은 병적・전사망자기록 등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라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꽃다운 청춘의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기록이나 예우에는 관심도 없었던 당국의 자세에 한숨부터 나왔다. 일단 전사 당시의 나이는 15〜35세로 추정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출생년도는 1916〜36년. 한국전쟁 이전에 양평군, 특히 지제면 지역에서 개교한 국민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생 명부를 확인하면 의외로 쉽게 단서를 잡을 수 있을 듯했다. 양평 군지(郡誌)를 통해 확인하니 다행히 지제국교(1932년 개교)와 일신국교(1936년 〃) 2개뿐. 더욱이 농촌인구 감소로 일신국교는 지제국교 분교로 들어가 모든 서류가 지제초등학교로 넘어간 상태였다.

희망의 순간, 절망이 다가왔다. 지제초등학교 홍태화 교감은 “졸업생 명부는 보존기한이 영구이지만 과거 명부는 한국전쟁 때 멸실돼 1954년 이후의 졸업생 명부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양평중학교와 지제면사무소 상황도 마찬가지. 양평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용문산・지평리 전투로 유명한 격전지이여서 호적부와 제적부 등 대부분 공공자료가 멸실됐고, 1954년 이후에 정비되기 시작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역시 정공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면적 78㎢에 인구 6000명. 발로 뛰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듯했다. 지난 14일 낮 12시 26개 리(里) 중 최씨 집성촌이 형성된 수곡1리와 송현3리를 직접 방문해 최씨 문중을 중심으로 탐문취재에 들어갔다. 지제면 지역에 사는 경주 최씨, 강릉 최씨, 해주 최씨의 족보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였다. 26개 동리에 군인 2명씩, 1개 소대로 하루만 찾아보면 유족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국의 무능력이 아니면 무관심, 둘 중 하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 군 당국은 인력과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든다. 육군본부 전사자유해발굴과 직원은 과장(대령)을 포함해 5명 뿐이고 1년 예산은 3억 8000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유족확인 요원은 1명으로 유해처리・상이용사지원・병적확인 등의 업무도 함께 맡고 있다.

양평 전화기록부에 나온 최씨 126명도 중요한 자료였다. 이들에게도 휴대전화를 이용해 틈틈이 전화를 걸었다. 특히 이름 가운데 최병구 일병과 같은 ‘병’자가 있거나 마지막에 ‘구’자가 있는 사람이 집중 공략 대상이었다.

수곡1리와 송현3리에서의 탐문취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최씨 문중에서는 아무도 최병구 일병을 기억하지 못했다. 파보(派譜)에도 이름이 없었다. 다만 경주 최씨의 다른 파에서 순서대로 식(植)자와 병(炳)자 항렬이 나타나 아버지 최만식씨와 최병구 일병이 경주 최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심증만 굳혔다.

휴대전화 누르기에선 약간의 성과가 있었다. 30여통의 통화 끝에 “최윤기씨 가족 중에 전사자가 있다”는 단서를 잡았다. 그렇지만 그 가족이 최 일병이라는 확증도 없고 최윤기씨 집 전화는 하루종일 불통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최윤기씨가 바로 최 일병의 맏조카였다.

무심히 흐르는 시간이 비웃는 듯했다. 오후 6시20분. 향토사학자로 지역 사정에 밝다는 방홍규씨와 다시 ‘최씨 사냥’에 나섰다.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일신3리 지산마을에 90세가 넘는 최모씨가 산다고 해서 그리로 향했다.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최병구는 죽은 장남”이라는 것이었다. 한줄기 서광이 비쳤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 아이가 한살 때인가 해방이 되고 만주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실수로 내 품에서 죽었어.” 다른 최병구였다. 힘이 쭉 빠져 마을 입구를 나오는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개천 다리 밑에서 고기를 구워 먹던 사람들이 무심히 툭 던지듯 말했다.“금동마을에 가면 최경기씨가 있는데 그 사람한테 물어봐.” 최경기씨는 최 일병의 친척으로 조카뻘이었다. “6・25때 군대에 갔다가 죽은 최병구 아저씨를 잘 안다. 친 조카도 지금 못저리에 살고 있다. 이름이 최윤기다”는 말에 춤이라도 출 것 같았다. 오후 7시50분. 그러나 확인이 필요했다. 윤기씨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불통. 못저리에 가서 윤기씨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반달만이 구름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옆집 사람은 “윤기씨의 동생이 다리를 다쳐 남양주시 마곡에 갔다”고 말했다.

30여분간 마을 다 뒤져서 윤기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냈다. 삐리리릭〜, 삐리릭〜 연결음 끝에 들리는 반가운 목소리. “여보세요.” “최윤기씨 아닙니까. 혹시 최만식씨랑 최병구씨 아시나요.” “저희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이신데 왜 그러시죠?” 기자의 설명을 들은 윤기씨는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막내 동생이 다리를 다쳐서 남양주시 마곡에 있는 넷째 동생 민기씨 집에 가족이 모두 모여 있다고 했다. “마침 돌아가신 큰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기자가 최 일병의 이야기를 해서 놀랐다”는 말도 했다. 그래도 직접 만나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양주로 차를 달렸다. 오후 10시 민기씨 집에 도착했다. 취재에 들어간지 60여 시간만에 ‘최 일병 구하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양평・남양주=김청중・박진우 기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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