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9호세대대탐험](53)하이힐에 망가진 위장전술

2005. 1. 21.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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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보는 순간 흥분이 싹 가시고 말았다. 기다리던 날이 왔고 그녀는 정확하게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게다가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였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한 가지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고려대 독문과 2학년 김동광(전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소장, 현 자문위원)은 광화문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상대는 검정고시 야학을 통해 알게 된 수도여사대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상당히 미인이었고, 서로 마음도 잘 맞았다.

그는 서울대가 기획한 광화문 시위 정보를 알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에서 데모는 "전설"이 된 지 오래였다.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된 1975년 4월 8일 이후 3년 남짓 학내 시위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긴급조치 9호 하의 첫 도심시위이자 연합시위가 될 이 거사에 꼭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아베크족으로 위장하면 검거될 위험이 적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멋진 계획이었다. 시위를 핑계로 데이트 신청을 하고 데이트라는 안전장치를 갖고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임도 보고 뽕도 따고"가 아닌가!여학생 손을 잡고 경찰 쪽으로그런데 이 기막힌 계책이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그녀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타이트한 치마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나온 그녀를 보자 기겁했다. "저 차림으로 어떻게 데모를 하지...."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1978년 6월 26일 오후 6시. 땅에서 김동광이 기절초풍한 것과는 달리 하늘에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중부 내륙지방에 머물 것이라는 기상예보에도 불구하고 장마전선이 평양~원산까지 북상해버린 것이다. 비구름대의 중심권에서 벗어난 서울지역은 간간이 비를 뿌리는 데 그쳤다. 시위하기에는 땡볕이 내리쬐는 것보다 더 좋은 날씨였다. 이날 낮부터 광화문 일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때 4000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26일 저녁 예고한 대로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이기 시작한 학생과 시민의 수는 이날 낮부터 펼쳐진 삼엄한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물밀 듯 불어나서 한때 4000명 선에 육박했는데 학생들은 1000명을 헤아리는 경찰병력과 산발적인 충돌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반정부 데모가 학원 밖으로 나온 것은 1972년 유신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특히 18일 전에 예고해 경찰이 경계망을 펴게 한 후 이를 뚫고 감행했다는 점에서 박 정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박찬웅 "박정희-전두환의 난 9" 아우내 1979년) 김동광은 종로1가 쪽 시위대에 섞여 있었다. 그는 시위대와 시민 틈에 숨어 있는 사복형사들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표식으로 긴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들을 경계하면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한다면 여자친구의 하이힐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듯했다. 이를테면 체포조가 시위대를 공격할 때 도망가지 않고 여학생과 손잡고는 반대편인 경찰 쪽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식이었다. 경찰은 번번이 그의 위장전술에 속아넘어갔다.

그는 고려대 지하서클 "민맥"의 핵심 인자였다(민맥은 1980년대에 공개하면서 사용한 이름으로 그 전에는 무명 서클이었다). 민맥은 정외과 75학번 정경연(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 등이 조직한 서클인데, 78학번까지 "전원이 몰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모두 감옥에 간 것은 아니지만 언더그룹에서 그렇게 통할 정도로 강력한 운동조직으로 꼽혔다. 민맥은 1980년대 고려대 학내 운동이 겨레사랑회(겨사)에 기반을 둔 "겨사그룹"과 "반(反)겨사그룹"이 분화, 갈등 국면에 들어갈 때 반겨사그룹의 입장을 대표하는 위치가 된다.

"유신 고대"의 화려한 부활그러니만큼 김동광은 조직적으로 단련돼 있었다. 실전 경험은 없지만 시위의 방법론과 검거를 피하는 요령, 경찰 조사에 임하는 수칙 등을 잘 알고 있었다. 이날 광화문 시위로 학생 19명이 구속되는데, 대부분이 운동권과 깊은 관련이 없는 단순가담자였다. 훈련받은 운동권은 빠져나갈 구멍을 알고 조사에 효과적으로 대처한 반면, 단순가담자는 구속 사유가 무엇인지조차 몰라 곧이곧대로 진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위대와 경찰을 오가며 줄타기 시위를 하던 김동광이 덜미를 잡힌 것은 잠시 방심한 탓이었다. 시위대의 맨 앞쪽에 있는데 경찰이 갑자기 덮친 것이다. 이미 경찰의 눈에 띄었으니 이런 상황에는 아베크족으로 위장할 수 없다. 그는 학생들이 달아나는 쪽으로 몸을 돌려 내달렸다. 바로 이때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여자친구의 비명이 들렸다. 학생들 틈에서 그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그 여학생을 일으켜 세워 함께 도망칠 수 있는 타이밍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고민을 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일으켜 세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여학생은 잡히더라도 훈방될 가능성이 크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나 혼자라도 도망치는 게 실익이 컸다. 그런데 차마 넘어진 파트너를 놔두고 혼자 도망칠 수는 없었다."김동광의 최근 회고. 그는 여학생을 일으켜 세우다 사복형사에게 체포됐다. 나중에 그는 구속되고 여학생은 훈방된다. 뒷날 그는 부평 동보전기에 위장취업했다가 인노련-전국노운협 등에서 공개-비공개 노동운동을 두루 벌인다. 1990년 노동운동권의 사투(사상투쟁)가 극심해진 시기에 운동을 청산한 뒤로는 "과학시대"라는 출판기획사를 하면서 "과학운동"이라는 특이한 분야를 개척한다. 최근 이 분야의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광화문 시위로 고려대는 김동광을 포함해 7명의 구속자를 냈다. 서울대(8명)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기획은 서울대에서 했지만 호응과 참여는 고려대가 가장 적극적이었던 셈이다. 이런 결과는 당시 고려대 운동권 내부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고려대는 학생운동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강한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NH회-검은10월단 사건과 긴급조치 7호를 겪으며 모든 조직이 회복불능 상태에 빠진 가운데서 긴급조치 9호를 맞았다. 서울대-연세대-서강대는 물론 이화여대까지 학내 시위를 벌이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던 시절이다.

광화문 시위로 구속된 7명 가운데 논란의 핵은 이승환(현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이었다. 경제학과 76학번인 그는 당시 3학년이었다. 공식적으로 학생운동을 표방한 학내 유일의 합법서클이던 겨레사랑회의 주축으로 고려대 학생운동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광화문 시위 현장에 나갔다가 연행돼 덜컥 구속돼버린 것이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1978년 초까지 "유신 고대"라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서울대-연세대가 반유신 데모를 하고 심지어 이화여대까지도 나서는데 고려대는 잠잠해서 나온 말이다. 고려대의 화려한 학생운동사에 비춰볼 때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런 차에 광화문 시위 정보가 교회나 타 학교와 연계된 연합서클을 통해 학내에 유입되자 그걸 키우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많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했고, 내부적으로도 박정희 정권과 한판해야 한다는 정서가 상당해서 기대를 하고 현장에 나갔던 것이다."즉 6-26광화문 시위를 관악에서 준비하고 있는데, 그 판에 고려대가 가서 움직여줄 필요가 있다는 게 학내 다수의견이었다. 법률행정연구회(법행연) 회장이었던 강춘구(현 부산 강춘구회계사무소장)도 이승환과 비슷한 생각으로 광화문에 나갔다. 그는 "서울대 P(유인물)에서 광화문 시위를 제안했다는 사실이 고려대 운동권에 돌았는데 다 나가자는 분위기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주전론"과 "자숙론"의 갈등법행연은 76학번 강춘구-이명식(현 참여시대고양포럼 이사장) 등이 창립한 법대 이념서클이다. 1978년 5월에 처음 등록했으니까 6-26광화문 시위 때는 세상에 태어난 지 2달도 채 안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회장인 강춘구가 광화문 시위 현장에 있다가 검거돼 구속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서클은 긴급조치 9호 시절 고려대 법대를 대표하는 이념서클로 존재하다 법학회와 행정학회로 맥이 이어진다.

고려대 흥사단아카데미 조직인 도산연구회의 송광의(현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마찬가지였다. 도산연구회는 도천수(현 푸른시민포럼 대표)-김태일(현 영남대 교수) 등의 투사를 배출한 조직으로, 당시 등록을 하지 못한 채 지하서클로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정경대 2학년생(나중에 경제학과 졸업)으로 휴학중이던 송광의는 "서클에서 (광화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분위기였다"며 "아카데미 동료들과 함께 나갔는데 혼자 구속됐다"고 최근 밝혔다. 다음은 그의 재판기록 중 광화문 시위 관련 부분이다.

"6월 26일 18:00경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고려대학교 앞에서 38번 노선버스에 승차하여 18:15경 종로구 세종로 소재 세종문화회관 앞 버스정류장에 하차하여 부근에 불법시위를 하려고 운집해 있던 약 200명 가량의 학생들 틈에 가담하여 경찰관이 성명불상의 신부를 동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와와"하고 야유를 하고, "신부를 왜 잡아가느냐"고 고함을 치다가 시위 저지차 출동한 경찰관들의 해산 지시를 받고도 계속 그곳에 머물러 불법시위를 하려다가 동대문경찰서 근무 순경 강차랑에게 검거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광화문 시위에 대한 고려대 운동권의 시각은 이처럼 대체적으로 긍정적이었다. 비록 조직적으로 오더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각 서클 단위나 개인 차원에서 알아서 참가하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언더그룹 코어는 이와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민맥을 대표해 75학번 언더모임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정경연의 얘기를 들어보자."고려대는 워낙 인자가 없으니까 거기(광화문)에 투입돼 잘려나간다면 그 효과에 비해 많은 희생이 치르는 꼴이 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서울대가 6-26을 예고하면서 기본적으로 역량이 부족한 타 대학에 참여를 요구한 것 자체가 막말로 "제국주의적 속성"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정도다. 실제로 당시 고려대가 처한 상황에 6-26은 큰 손실이고, 그런 측면에서 승환이가 무책임하게 행동했다는 서운함이 내부에 있었다."이승환과 함께 겨레사랑회의 76학번 주축이었던 엄주웅(현 한국디지털위성방송 마케팅본부장)도 "승환이가 다음 준비의 1번 타자였는데 구속돼 앞이 캄캄했다"고 최근 회고했다. 고려대도 연세대와 마찬가지로 76학번이 두터운 층을 형성해 선배그룹(75학번)을 압도하는 형세였다. 1978년 들어 이들의 내부가 분화하면서 2학기부터는 1진(학내시위팀)이 치고나가기로 하고 거기에 맞춰 판을 짜고 있었다.

이승환의 광화문 시위 참여는 이런 차원에서 내부 비판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시각이었을 뿐이다. 정경연의 얘기를 더 들어보면...."승환이는 헌신적인 친구였다. 그의 활동력을 누군가가 적절히 제어해주면서 같이 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당시에는 "무책임" 운운하며 승환이를 비판했는데, 이는 한쪽만 생각한 것이었다. 학생운동 자체가 대안 없는 무책임한 운동일 수도 있다. 지금이라면 나는 승환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변호할 수 있다."고려대는 이 시기에 고전연구회가 겨레사랑회로 이름을 바꾸고, 앞서 언급한 법행연을 비롯해 민연(민족이념연구회)의 후신인 사회과학연구회와 한국농어촌문제연구회(한농회) 등이 합법 영역에 진출한다. 모두 1978년 상반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고려대 운동조직은 겨사-법행연-한농회-동민회-한국학연구회-사회과학연구회 등 합법조직과 민맥-도산연구회 등 미등록 지하서클이 공존하는 구도로 재편된다.

고려대 구속자 7명은 모두 이들 서클의 조직원이었다. 이승환-강춘구-송광의-김동광 외에도 정외과 2학년 허현회(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상임이사)는 한농회, 영문과 2학년 임경민(현 산하미디어 기획실장)은 동민회 소속이었다. 유일한 1학년생인 이정구(현 백지 대표)는 정경대(뒤에 경제학과 졸업) 소속으로, 민맥의 신입 회원이었다. 임경민은 전주고-전주여고 출신 의식분자의 모임인 "한울"을 통해 광화문 시위에 참여했고, 이정구는 소속 서클인 민맥이 아니라 한국학연구회 안희대(작고)의 콜을 받고 멋모르고 광화문에 나갔다가 구속됐다.

이렇듯 고려대는 언젠가 큰 싸움을 진두지휘할 7명의 투사를 광화문에서 잃었다. 이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가뜩이나 어려운 판에 희생양이 된 꼴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배경과 사정이 있었다. 고려대 학생운동의 전통, 학내 정서, 외부 조건 등등.... 이 가운데 어이없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학내 사찰라인과 관계가 있었다. 먼저 이승환의 기억을 더듬어보자."서울대의 기획과 고려대의 희생""고려대생은 서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서부서장이 1980년대 신군부 집권 시절 "쓰리허(三許)"의 일원으로 유명한 허모씨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허씨가 와서 서장과 얘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강경조치를 주문한 것 같았다. 서부서장의 과잉충성 때문에 고려대생이 많이 구속된 것이다. 조사를 받으며 질문을 하거나 반대의견을 낸 학생은 다 구속했으니...."강춘구의 기억은 좀 더 구체적이다. 연행자 중에 유독 고려대생만 위험분자를 골라 구속한 것은 학내 사찰라인이 깊이 개입한 결과라는 것이다. 당시 고려대를 담당한 중앙정보부 요원은 같은 학교 출신인 한모씨였는데, 그가 연행자 명단에서 위험분자를 찍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구속된 고려대생의 판결문을 볼 때 하나 같이 극렬가담 혐의가 아니라 "...도주함으로써 불법학생시위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고" "불법시위를 하려다 검거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등과 같이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미수 혐의를 적용하고 있다.

고려대 학생운동의 컬러는 서울대와 라이벌 관계이면서 보완 관계였다. 예를 들면 서울대가 이슈를 생산하면 고려대가 파워를 과시하는 식이었다. 이런 전통이 긴급조치 9호 하에서는 작동되지 않았다. 물론 광화문 시위를 "서울대의 기획과 고려대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놓고 보면 비슷하게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어쨌든 1978년 상반기까지 고려대 운동권은 죽을 맛이었다. "학생운동의 주도권이 관악으로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하도 데모를 안 하니까 "괴뢰대학"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쪽팔려서 학교에 못 다닐 정도였다." 고려대 긴급조치 9호 세대 한 인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광화문 사태"도 고려대 쪽에서 보면 좀 더 인고하며 때를 기다렸어야 하는데 너무 조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자초한 대형 참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3년 여의 와신상담 끝에 맞은 1978년 초여름의 사태는 고려대가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반전드라마"의 서막에 불과했다. 희생자마저 가혹하게 비판대에 세울 정도로 철저하고 비장해진 고려대 언더지도부는 가을을 기약하면서 2가지 모의에 돌입한다. 하나는 3년의 침묵을 한꺼번에 만회하는 드라마틱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심장을 겨눈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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