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상남의 奇人野史]현비의 죽음

2005. 1. 20.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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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靖難)의 변으로 조카의 황위를 찬탈하고 권좌에 오른 영락제(永樂帝). 호방한 기상으로 대제국 건설의 웅대한 꿈을 가슴에 품은 그는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 깜짝 놀랄 선물을 해야겠는데…!’ 정화(鄭和)의 남해원정이나, 안남토벌(安南討伐)의 막중대사도 접어두고 영락제는 한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영락제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영락제의 얼굴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줄 선물을 떠올리며 환하게 밝아졌다.

건청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수많은 학자들과 왕족들이 초대됐다. 해진(海縉)과 도연(道衍)을 비롯해서 ‘영락대전(永樂大典)’의 편찬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와 종신들이 모인 자리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참살로 빚어진 유림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영락대전’의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동안 ‘칙찬서(勅撰書)’를 편찬하느라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개국이 창칼로 이뤄졌다면 치세의 기조는 학문이 돼야 함은 경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부디 이 나라 학문을 기조하고 정립하는 데 더욱 힘써주시오.” “신명을 다해 받들어 봉행하겠나이다.” 술이 몇 순배 돌아 연회 분위기가 고조되자 영락제는 가까이에 있는 도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자리에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학자들이 모였는데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어 후세에 남기게 함이 어떻겠는가?” “하오시면 폐하께서 시제를 내려주시옵소서.” 영락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짐이 총애하는 현비(顯妃)를 위해 시를 지어보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그동안 현비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못했는데 오늘 경들이 짐을 대신해 가장 귀한 선물을 하는 게?” 현비는 조선에서 뽑혀온 다섯 명의 공녀 중 권집중(權執中)의 딸이다. 정온하면서 유순한 언행과 청초하고 순결한 자태를 보고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현인비(顯仁妃)에 봉했다. 그것은 대명 황실의 통념을 깬 파격적인 책봉이었다. 조선에서 온 공녀를 즉석에서 황후 다음 서열에 봉한 것에는 그 미색도 한몫했겠지만 생모의 고국인 조선을 그리워하는 영락제의 속마음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락제가 시제를 제시하자 연회에 참석한 학자들과 왕족들은 앞을 다투어 현비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 영헌왕(寧獻王) 주권(朱權)이 지은 시가 영락제의 마음을 가장 흡족하게 만들었다.

‘홀연히 하늘 밖에서 들려오는 옥퉁소 소리여. 나 홀로 꽃그늘을 거닐면서 듣노라. 삼십육궁에 가을색이 완연한데. 달빛이 남김없이 밝히도다.

금붕어 노니는 창가에 찬 기운이 짙어가고, 아득히 구름은 날아서 달빛에 감도는구나. 밤은 깊어 삼경인데, 미인의 퉁소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도다.’ 현비는 절세의 미녀였을 뿐 아니라 옥퉁소의 명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방효유의 ‘10족’을 참살했던 영락제. 그러한 그도 총애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남자였다.

영락 5년 7월. 서황후(徐皇后)가 세상을 떠났다.

서황후는 황후로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오빠인 서휘조(徐輝祖)는 정난의 변 당시 남경성에서 최후까지 영락제와 공방전을 벌였던 인물이다.

영락제에게 생포를 당한 후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눈빛을 세웠다. 분개한 영락제는 한때 서휘조를 참살하려 했지만 그가 개국공신인 서달(徐達)의 아들이요, 자신의 처남이기에 목숨만은 부지케 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영락제는 자연 서황후의 처소에 발을 끊고 오로지 현비만을 총애했다.

서황후가 죽었지만 영락제는 새로 황후를 봉하지 않았다. 대신 현비에게 육궁(六宮)을 관장하게 했다. 한낱 공녀로 끌려간 조선의 여인이 대명제국의 실질적인 제2인자가 된 것이다.

“얼마나 조대가(曹大家)의 ‘여계(女誡)’에 깊이 빠져 있기에 짐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으신가?” 밤늦은 시간에 처소를 불쑥 찾아 온 영락제를 맞으며 현비는 몸가짐을 바로 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녀는 조대가가 남긴 여계를 가까이 두고 육궁을 다스리고 황제를 보필하는 지침으로 삼았다. 조대가는 한대(漢代)의 여인으로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여동생이자,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를 완성한 반소(班昭)의 또 다른 호칭이다.

“황공하옵니다.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고…!” 영락제는 현비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반소는 ‘고금인물론’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따져 역사적으로 상・중・하로 삼등분했다고 하는데 설명을 해주겠는가?” 현비는 성급하게 옷을 벗기는 영락제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유순한 자태로 사내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착하기만 하고 악한 짓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을 상지(上智)라 하였고, 착한 짓도 하고 악한 짓도 한 사람을 중인(中人)이라 하여 제나라의 환공(桓公)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았으며…!” 영락제가 슬그머니 자신을 함몰시키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일어날 때까지 억센 힘으로 현비의 몸을 누르고 또 짓눌렀다. 고금인물론은 더 이상 침상 위에 머무를 수 없었다. 환공이 무엇이고 중인이 그 무엇이랴. 마침내 패잔병처럼 축 늘어진 영락제. 현비는 그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쁜 짓만 하고 착한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하우(下愚)라고 해서 걸주(桀紂)나 오왕부차(吳王夫差) 같은 사람을 꼽았어요.” “그럼 짐은 어디에 속하는가?” “소첩이 세 치 혀로 어찌 폐하를 평하리까? 다만 소첩은 폐하께서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시도록 신명을 다해 보필할 것이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것은 소첩이 부덕하고 부족한 소치가 될 것이옵니다.” 영락제는 현비의 토실한 젖가슴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거칠고 황량한 미소를 머금고…! “짐은 결코 역사에 성군으로 기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태평성대를 피로 일궈낸 피의 정복자가 되기를 원할 뿐. 어쩌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륙의 역사가 짐에게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비는 영락제의 메마른 가슴으로 깊이 안겨들었다. 가뭄에 갈라터진 땅에 빗물이 스며들듯이. “손에 피를 묻히시더라도 가슴은 항상 따뜻한 정으로 채우소서. 소첩을 사랑하는 지금 이 넓은 마음과 아량으로 백성과 신하들을 사랑하소서.” “이…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현비전의 궁녀는 여귀진(呂貴眞)이 은밀하게 내놓은 진귀한 보석들을 보며 심장이 뛰었다. 여귀진은 현비와 함께 조선에서 뽑혀온 공녀 출신으로 현비와는 연적 관계다. 여귀진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어 궁녀의 손에 쥐어주며 추악한 음모에 끌어들였다.

“여기 한쪽에 기울어가는 해가 있고, 또 다른 곳에 떠오르는 달이 있다. 너는 어디를 선택하겠느냐? 기울어가는 해는 현비고, 떠오르는 달은 나다.” “소…소녀는 그저 무섭기만 하옵니다.” “너는 내가 준 그 약을 현비의 음식에 타서 먹게 하면 된다. 나는 이미 조선 출신의 내관인 김득(金得)과 김량(金良)에게 뒷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마무리하도록 손을 써놓았다. 개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법. 너는 현비를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네가 현비에게 받은 것은 무엇이더냐?” 궁녀는 현비의 극진한 보살핌과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물질적인 풍족은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몸소 검박한 생활을 실천해 육궁을 다스리는 덕목으로 삼았던 현비가 사치와 낭비를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눈앞의 보물에 눈이 먼 궁녀는 마침내 현비를 독살하는 음모의 하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날은 영락제가 태묘에 제를 올리기 위해 궁을 비웠다. 밤늦은 시간까지 현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대가의 ‘천문지’를 읽으며 궁녀를 불렀다.

“향편차(香片茶)를 갖다 주겠느냐?” 기회만 엿보던 궁녀는 향편차에 독약을 타 현비에게 올렸다. 평소 신임하던 몸종이 올리는 차라 현비는 의심 없이 차를 마셨고, 그것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궁녀가 여귀진의 처소로 달려가 현비의 죽음을 고하자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아주 잘했다. 이제 황상 폐하의 사랑은 내 것이 될 것이다. 황제의 품에 안겨 세상의 모든 기쁨과 영화를 누릴 것이다.” 현비. 조선의 공녀로 뽑혀와 광활한 대륙의 주인인 영락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격동기의 황실을 이끌던 여인. 그 돌연한 죽음은 영락제의 심부에 박힌 포악성에 다시 불을 지폈으니….■발문 현비의 비참한 죽음은 음모의 한 축을 담당했던 태감 김득에 의해 태묘에서 제를 올리던 영락제에게 곧바로 전해졌다. 영락제는 총애하던 현비의 죽음에 대로했다. 그리하여 추상과 같은 명이 떨어졌다.

“내가 제를 마치는 즉시 현비에게 갈 것이니라. 그때까지 누구도 현비의 처소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며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라.” 현비전에 도착한 영락제는 총애하던 현비의 비참한 죽음을 대하자 불 같은 분노를 드러냈다. 방효유의 10족을 참살했던 그 살기로 명을 내려 음모자를 색출해 갔다. 독약의 출처를 추궁해 은장이가 체포되고 주모자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영락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은장이를 위시해서 김량과 김득, 그리고 궁녀를 잔혹하게 참살했다.

마지막으로 현비를 모살한 여귀진이 영락제의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영락제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여귀진에게 쇠를 불에 달구어 단근질하도록 명령했다. 자신이 기대하던 영화 대신 낙형(烙刑・단근질)을 받은 여귀진. 인과응보란 세상의 눈에는 공평한 것이지만 당사자가 겪기에는 참기 힘든 것이다. 살이 타들어 가는 악취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영락제는 그러나 이런 형장의 모습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죽은 현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광활한 사막지대로 친정에 나서면서까지 항상 곁에 두었던 현비. 그녀는 권력다툼과 살육의 피바람에 지친 영락제에게 새 생명의 자양분을 제공해주던 여인이었다. 그러했기에 현비의 죽음은 영락제에게는 물론이요, 명나라의 앞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무협・만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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