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렬의 새이야기]뜸부기

2004. 11. 1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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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오빠생각’은 일제의 수탈과 징용을 피해 울분을 삭이며 서울로, 만주로 떠나간 오빠를 그리는 누이동생의 애절한 정이 담긴 노래로 동요시인 최순애(1914〜1998) 선생이 어린 시절에 쓴 동심 가득한 작품이다. 노래가 지어진 1925년 우리 들녘에선 무수한 뜸부기가 새끼를 키우며 여름을 났을 것이다.

해마다 봄이 찾아오면 나는 흙먼지 날리는 천수만 간척지 비포장길을 내달리다 뜸부기의 굵고 힘찬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종종 논둑에 올라 귀기울여 본다. 뜸부기들이 살아가던 논에서 이놈들을 발견하기란 이젠 쉽지 않다. 우리 논들이 우렁이, 수서곤충, 미꾸라지 등 다양한 생명을 키워내던 습지에서 쌀만 생산해 내는 단순하고 척박한 땅으로 바뀌면서 화학비료와 각종 농약이 살포돼 그곳에서 먹이를 잡아먹으며 새끼를 키워내던 뜸부기들은 서식지를 잃고 자취를 감춰가는 형편이다.

번식기가 되면 수컷은 머리에 닭볏처럼 붉은 이마 판이 솟고 온몸은 검푸른 색으로 바뀌는데, 멀리서 조심스레 걷는 모습을 보면 마치 검은 닭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나선 듯하다. 한자로 수계(水鷄) 또는 앙계(秧鷄)라고 일컬었던 것을 보면 뜸부기과의 새들이 논이나 물을 떠나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옛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번식지에 도착한 수컷들은 자신의 세력권을 만들어 경계하듯 그 주위를 돌며 연방 ‘뜸〜, 뜸〜, 뜸〜’거리며 암컷을 유혹하기에 바쁘고, 뒤늦게 도착한 암컷들은 보금자리를 틀기에 좋은 영역을 가진 수컷을 찾아 짝을 맺는다.

천수만 와룡천을 돌아 간월호로 향하는데 길가에 뜸부기 두 마리가 붉게 물든 석양을 배경으로 힘 자랑을 벌이고 있다. 깃털을 한껏 부풀려 덩치를 키우고 목소리를 높여 우렁차게 울어대는 위세로 보면, 큰 싸움이 일어날 듯한 순간이다. 그러나 불청객의 훼방 때문일까? 결투를 미룬 채 서로 눈치를 보며 옆걸음질로 자리를 피한다.

뜸부기 수컷들이 경쟁자들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일 경우 대부분 힘세고 덩치가 큰 놈이 승리를 거두는데, 승자에겐 좋은 번식지와 암컷이 예약되는 셈이다. 자기 영역으로 암컷을 유인하기 위한 수컷들의 처절한 ‘러브 콜’과 ‘과시 행위’는 짝을 찾기 전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새들은 소리로 정보를 나누며 살아간다. 수컷은 번식을 위해 암컷을 유혹하는 사랑의 노래를 하거나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상대와 신호(Call)를 주고받기도 한다. 신호 소리는 비교적 짧고 단순하나 대개 번식기에 내는 노랫소리는 비교적 길고 복잡하다.

독특하게도 노랫소리 같지 않게 ‘뜸〜, 뜸〜, 뜸〜, 뜸북, 뜸북, 뜸북’ 하며 단음절 혹은 두 음절의 소리로 울어댄다. 뜸부기는 번식기에만 노래하고 짝을 찾고 나면 은밀하게 풀숲 사이로 숨어 다니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해질녘 들판에서 온 목소리를 다해 울어대는 수컷의 세레나데는 암컷에게 자기 위치를 알리려는 것이지만, 이 울음소리 때문에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큰 몸짓에 비해 날개가 작은 뜸부기는 비행능력이 떨어져 사냥꾼들로부터 제 몸을 지키기 힘겹다.

◇애타게 찾는 것이 먹잇감일까.배우자감일까.검은 닭 형상의 뜸부기가 논둑에서 뭔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0만년 전에 태어나 지구를 생명의 무대로 삼아 번성하던 뜸부기들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천적은 바로 인간이다. 1600년 이래 전 세계에서 약 20종의 뜸부기가 멸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90%는 날개가 퇴화해 날 수 없는 새들이었다. 국내에서는 몸에 좋다는 속설 때문에, 동남아에서는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냥감으로 통하는 까닭에 개체수가 계속 줄고 있다.

종달새는 너무 높은 곳에서 울기에 잘 볼 수 없고, 뜸부기는 너무 낮은 곳에서 울기에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종달새와 뜸부기는 빛과 어둠, 하루의 시작과 마침을 예고해 주는 새이기에 들녘 생활이 많았던 우리 민족에겐 각별히 친근한 새였다. 종달새의 맑고 고운 노래도, 뜸부기의 굵고 낮은 울림도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 들녘이 오빠생각에 지친 소녀 마음을 달래줄 새 하나 없는 삭막한 벌판으로 남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이른 아침 논에서 뜸부기 노랫소리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동요 ‘오빠생각’을 흥얼거리게 된다. 뜸부기 소리가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뜸부기의 처지가 노래 속 옛적 오빠들과 같아서이지 않을까?사진부기자/leej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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