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조폭 비켜, 사기꾼 납신다!

최근 부쩍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국 영화가 잇따르고 있다. 4월 15일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제작 싸이더스)과 한주 뒤인 23일 개봉하는 김경형 감독의 [라이어](제작 씨앤필름)에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거짓말을 숨쉬듯 하는 사기꾼이다. 상영관에서는 이미 간판을 내렸으나 2월 말 개봉한 배형준 감독의 [그녀를 믿지 마세요](제작 시선)까지 합하면 최근 두 달 사이에 세 편의 사기꾼 영화가 등장한 셈이다.
사기의 종류는 저마다 다르다. [범죄의 재구성]이 경제사범들의 이야기라면, [그녀를 믿지 마세요]와 [라이어]는 애정빙자 사기꾼 이야기다. 장르적으로 전자는 정통 스릴러인 반면 [그녀를 믿지 마세요]와 [라이어]는 코미디이다.
은행 모방범죄 우려 경비 강화 [범죄의 재구성]에는 한국은행을 터는 목적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여섯 명의 사기꾼이 등장한다. 완벽한 시놉시스 개발자 "최창혁"(박신양)과 사기꾼의 대부 "김선생"(백윤식), 최고의 떠벌이 "얼매"(이문식), 타고난 여자 킬러 "제비"(박원상), 환상적인 위조기술사 "휘발유"(김상호)가 그들이다. 사기 달인들의 절묘한 아이디어와 치밀한 두뇌게임으로 이들은 계획대로 한국은행을 털어 50억원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결과가 없다는 것.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돈은 사라졌다. 이들이 은행을 탈출하기 직전 걸려온 제보전화로 얼매가 붙잡힌 데 이어 휘발유도 잡힌다. 주동자 최창혁은 차와 함께 불에 탄 시신으로 나타나고 제비도 동거녀에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후 영화는 돈을 빼돌린 진짜 사기꾼이 누구인지 추적한다.
이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한국은행은 모방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 본점과 16개 지역본부에 경비와 근무태세를 대폭 강화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1996년 구미 한국은행이 9억원을 감쪽같이 털린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당좌수표의 위조와 범행방법 등은 그때의 사건에서 착안한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은 [락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와 [오션스 일레븐](2002)을 연상시킨다. 가이 리치 감독의 [락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는 영국 양아치들의 돈다발 습격 사건을 그리고 있고, [오션스 일레븐]은 소매치기-폭파전문가 등 각 방면의 전문가들이 사상 최대의 카지노털이를 위해 뭉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라이어]는 영국의 극작가 래이 쿠니가 쓴 [런 포 유어 와이프(Run for Your Wife)]라는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택시업계 얼짱인 주인공 "정만철"(주진모)이 자신의 이중생활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부풀리다가 결국 탄로가 나는 과정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정만철은 아내 "명순"(서영희) 외에 1년 전부터 "정애"(송선미)와 사실혼 생활을 하고 있다. 택시영업을 하며 두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두집살림을 감쪽같이 해내는 그에게 어느날 시련이 닥친다. 생일에 우연한 사고로 현상수배범인 "신장원"을 잡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해 만철은 경찰과 기자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박 형사(손현주)는 신장원의 조직원이라는 의혹을 품고 만철을 주목하고, 특종을 노린 김 기자(임현식)도 만철을 주시한다.
이제 남은 영화 소재는 전기물?[라이어]는 꼬리에 꼬리를 잇는 재치와 유머가 보는 이를 포복절도케 한다. 그러나 원작이 1930년대 완성된 작품이어서인지,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대사가 많아 다소 거슬린다. 만철은 박 형사에게 자신의 이중생활을 감추기 위해 백수 친구인 "노상구"(공형진)와 자신이 살림을 차린 "게이"라고 속인다. 영화에는 박 형사가 이들을 보며 "호모색(새끼)..."이라며 혐오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수감 중이던 사기의 달인 "영주"(김하늘)가 특유의 거짓말로 가석방 심사를 통과,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행 열차를 탔다가 시골 약사 "희철"(강동원)과 인연을 맺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졸지에 희철의 약혼녀로 오인받아 그의 아이를 임신한 행세까지 해 희철을 파렴치한 바람둥이로 낙인찍히게 한다. 김하늘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한층 빛을 발하는 이 영화는 지난달 일본 해피넷 픽처스와 미니멈개런티 10만달러에 판권 계약을 했다.
한국 영화 중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는 그동안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우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1997)와 신승수 감독의 [할렐루야](1997), 박태우 감독의 [미끼](1998) 정도다. 특히 [범죄의 재구성]과 같은 범죄스릴러는 할리우드에서는 주된 소재이지만 한국 영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사기꾼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관객을 설득할 만한 사기 수법을 보여주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범죄의 재구성]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은 "할리우드에서는 스릴러나 미스터리가 메인 장르이지만 한국에서는 B급이기 때문에 한국 관객은 "영화 내용이 비현실적"이라는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며 "그것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등장인물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사기꾼 이야기가 영화 소재로 각광받는 현상에 대해서는 한국 영화의 소재와 장르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한국 영화에서 스릴러와 공포물, 사극, 전기물은 흥행하지 않는다는 게 경험에서 온 속설이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 장르의 금기가 빠르게 무너지면서 다양한 장르와 소재가 나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씨는 그 예로 "[살인의 추억]의 성공으로 범죄스릴러물이 관객몰이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고, [장화, 홍련]의 흥행으로 공포물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으며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사극 장르도 잘만 만들면 인기를 끌 수 있다는 확신을 한국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이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제 남은 것은 전기물로, 올해 개봉 예정인 [바람의 파이터] [슈퍼스타 감사용] [역도산] 등 역사 속 인물을 그린 영화의 성패가 주목된다.
사기꾼 영화가 한꺼번에 등장한 것을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문화평론가 김종휘씨는 "신용불량자와 청년실업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착실하게 저축해서 부자가 된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대신 로또 등 한탕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며 "사기꾼 영화의 증가도 그런 시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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