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결산 ⑧ 문학
걸로 해주세요)(최명희씨 타계로 내용추가함) (서울=연합) 任炯枓 기자 = 지난 9월 타계한 시인 박두진씨는 52년 전의 데뷔시집 「장미의 노래」에서 "다만 깊이 내 안에 가꾸어 온 것은 한송이 붉은 장미"라고 노래했다.
그의 말처럼 문학이 장미꽃같은 순수와 위엄을 내면에서 지켜가는 행위라면 올해 한국문학은 어떤 모습으로 그 생명력을 이어왔을까.
안타깝게도 문학계는 혹독한 고난과 빈곤 속에 한해를 보내고 있다. IMF라는 미증유의 사태는 문학계에도 큰 충격을 몰고와 시장 자체가 붕괴 직전에 놓였다. 문단은 올해 문학계가 별 특색없이 허우적거렸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문학에 대한 사망선고가 내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생각 밖으로 분투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11월 말과 지난해 같은 기간을 비교한 문학서의 한해 출판통계에 따르면 신간발행부수가 11.1% 준 반면 발행종수는 10.5%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을 좀더 들여다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평균발행부수가 지난해보다 6백부 정도 감소한 2천4백88부에 그쳤으며 발행면수도 지난해보다 줄었다. 일선 서점의 얘기는 더욱 심각하다. 대형서점의 경우 예년에 비해 20% 안팎의 매출감소세를 보였다.
문학평론가 정과리씨는 문학의 독서시장이 파괴되고 있음을 실감한다고 안타까워 한다. 시의 경우 '죽었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독서권 밖에 퇴출돼 있으며 IMF 이전에 급팽창하던 소설산업도 이전의 관성에 따라 책을 낼뿐 이것이 독서와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또다른 얘기라고 말한다. 이는 두터운 독서층을 이룬 고학력 주부와 사무직 여성들이 IMF후 대거 이탈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편에서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문학이 내적 응축기를 가진 한해였다고 해석한다. 최근 몇년간 문단을 휘젓던 표피적 신세대 문학이 뒤걸음질친 반면 내적 성찰을 꾀하는 기성세대의 작품이 그 공간을 메웠다는 얘기다. 신세대 작가 중 몇몇을 뺀 나머지는 문학적 훈련이 좀더 필요함을 보여주며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
이혜경씨의 창작소설집 「그집앞」이나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나희덕씨의 시작들은 탄탄함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김수영문학상은 2년째 여성작가를 수상자로 배출해 눈길을 모았다. 신인작가 이치은씨의 장편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도 소설미학이 결코 쇠퇴하지 않았음을 웅변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활동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여성작가들이 올해도 문단을 일정부분 주도하며 기세를 올렸다. 대중소설로 방향을 튼 양귀자씨는 장편 「모순」으로 베스트 셀러에 장기간 올랐으며 박완서, 은희경, 공지영, 김형경, 신경숙씨 등도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시대적 욕망을 끌어냈다.
시인 황금찬, 구상, 김종길, 이형기, 신경림, 고은, 도종환, 노향림, 천양희씨 등 원로와 중견도 육중한 시세계를 유지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황씨는 시집 「옛날과 물푸레나무」에 이어 원고 5백장의 대서사시 집필에 들어갔고, 이씨는 투병중에서도 「절벽」을 일궈냈다. 신씨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으며 쓰러져가는 시단을 떠받쳤고, 김씨도 10여년만에 「달맞이꽃」을 내놓았다. 「부드러운 직선」의 도씨는 9년만에 교단으로 복귀하는 감회를 누렸다.
서점가에서 단연 화제를 모은 시인은 류시화씨. 그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등 감성 시집으로 시부문 베스트 셀러를 장악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소설에서도 중견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홍어」의 김주영씨는 50만부 판매로 문단을 주도했고, 양귀자씨의 「모순」과 이인화씨의 「초원의 향기」도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 셀러에 오르며 각각 33만부와 20만부가 팔렸다. 은희경씨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도 발간 보름만에 10만부가 판매돼 두터운 독자층을 자랑했다.
이문열씨와 김원일씨가 집필 10여년만에 대하장편「변경」과 「불의 제전」을 완간한 것도 올해의 일이며 임철우씨는 10여년의 각고 끝에 「봄날」을 출간했다.
평론에서는 별 이슈없이 한해를 보냈다. 백낙청씨가 ≪창작과비평≫에 신경숙씨의 소설 「외딴방」을 비평한 것을 계기로 민족문학론 확장의 유효성 논쟁이 일었고, 한기씨와 이광호씨가 유미리씨의 「타일」을 둘러싸고 문학성 여부 논쟁을 벌였으나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또 ≪문학과사회≫에 기고된 홍정선씨의 글을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생산적 결과에 이르는 데는 실패했다.
올해는 또 시인 박노해씨가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데 힘입어 70년대 이후 처음으로 '투옥문인 제로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최후의 청록파 시인 박두진씨와 원로 시인 황명씨, 소설가 최명희씨가 차례로 타계한 것은 문단으로서는 큰 상실이자 아픔이었다. 문단의 행사로 주목받은 것은 대산문화재단이 9월에 주최한 '젊은작가 포럼'으로 20대에서 40대 작가가 중심이 돼 21세기의 문학적 진로를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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