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楊尙昆-楊白氷형제 권토중래(捲土重來)할까?

1997. 4. 2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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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北京)=연합(聯合)) 李敦琯특파원 = 중국의 최고 실권자였던 鄧小平과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상무위원장을 지낸 彭眞이 약 2개월의 간격을 두고 사망함에 따라 최고 원로의 대우를 받게 된 사람은 前국가주석 楊尙昆(90).

楊尙昆과 동생 楊白氷(77)은 한때 인민해방군을 움직인 이른바 `楊家將' 세력의 핵심인물들로 군부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지난 92년10월의 중국공산당 제14기 전국대표대회와 93년 3월의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를 통해 楊白氷의 정치국원 자리를 제외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楊尙昆은 「8老」의 한사람으로 원로 대우를 받으면서 가끔 지방시찰을 하는 모습이 관영매체에 보도되고 있는 정도이며 동생 楊白氷은 국가 영도기관의 보직을 가진 여느 정치국원들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채 침묵을 지켜왔다.

일부 관측통들은 江澤民체제를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한 鄧小平의 견제로 그동안 중앙 정치무대 일선에 나서지 못했던 이들 형제가 江주석과 일부 분야에서 마찰을 빚은 적이 있음을 들어, 鄧小平이 사망할 경우 군부에 대한 영향력 회복과 발언권 강화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망했었다.

鄧小平장의위원회 명단에 나타난 서열은 楊尙昆의 경우 현임 정치국 후보위원에 이은 24위였으며 현임 정치국원인 楊白氷은 吳邦國, 鄒家華, 姜春雲, 錢其琛 등 정치국원 겸 부총리보다 앞선 14위였다.

楊尙昆은 彭眞이 사망함으로써 5명으로 줄어든 「8老」중 최고령자이지만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공식활동을 오랫동안 중단하고 있는 4명의 원로들과는 달리 금년 춘절(春節) 전에 珠海를 포함한 남쪽지방을 시찰하는 등 건강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형제의 영향력 회복 시도 등으로 해석될만한 움직임이나 조짐은 鄧小平이 사망한지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미 그렇게 할 수 있을만한 세력을 잃었거나 시기를 놓쳤을 것이라는 분석을 낳고 있다.

楊尙昆은 1930년대 군단 정치위원으로 팽덕회(彭德懷), 林彪, 섭(攝에서 손수변 없음)榮臻 등과 어깨를 나란히한 원수급 인물이자 1945년이래 1965년까지 군부의 최고 영도기관에서 주요업무를 담당해왔으며 鄧小平의 심중을 잘 헤아렸던 측근중의 한사람.

이 때문에 89년 6.4사태가 발생하자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이었던 그는 당시 上將으로서 인민해방군 총정치부주임 겸 중앙군사위원이었던 동생 楊白氷과 함께 鄧小平의 입장에 동조, 무력진압의 강경노선을 견지함으로써 국가의 혼란방지와鄧小平체제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의 강경노선은 조자양(趙紫陽)을 중심으로한 급진 개혁세력을 꺾는 동시에 `楊家將'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고 얼마후(89년6월24일 제13기 5中全會) 형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으로, 동생은 중앙군사위 비서장 겸 중앙서기처 서기로 승진해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당시 최고 실권자 鄧小平은 劉華淸을 중앙군사위 상무부주석으로 임명,`楊家將'세력 견제에 나섰고 그후 楊尙昆이 楊白氷을 중앙군사위 주석으로까지 천거,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려고 시도하자 결국 92년 10월의 14全大에서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군계통의 직위를 박탈해 버렸다.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을 줄 알면서도 鄧小平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楊家將'의 독립세력화를 원치 않았고 이들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군 경험이 없는 江澤民의 군부내 기반 구축을 뒷바침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당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주석 등 3개의 최고권력을 모두 잡은지 5년 가까이 돼가는 江澤民은 그동안 군부내 각 파벌의 균형인사와 이른바 `山東幇' 중용 등을 통한 측근 만들기 등의 방법으로 거의 완전히 군부를 장악했으며 `楊家將' 세력을 대부분 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한 鄧小平이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의 5년이라는 기간은 江澤民주석에게 권력의 기반을 보다 공고하게 다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반면에 막강한 군부 실력자였던 그들 형제에게는 권토중래의 터전이 와해되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군부내에 뿌리내린 그들 세력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의례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楊尙昆이 최고 원로가 된데다 92년 폐지됐던 중앙고문위원회 부활설도 나오고 있어 앞으로 이들 형제의 거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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