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서울대 50년-대학풍속도 변천史

1996. 10. 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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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聯合)) 동숭동 시절을 마감하고 관악캠퍼스로 옮겨와 개교 50년을 맞는 서울대가 반세기의 대학풍속도를 그린 「50년史」를 9일 출간했다.

이에 따르면 60년대까지의 동숭동시절 대학문화는 심각한 생활고로 인해 교정의 벤치에서 노숙한뒤 아침에 수위실에서 이를 닦던 `치솔부대'가 주도한 이른바 `거지문화'가 주류.

4.19를 전후로 재즈와 트위스트가 난무하고 막걸리 `주선(酒仙)대회'가 판쳤으며 대학로의 대표적인 다방인 학림다방이 학생들의 토론처로 정착되기도.

70년대 서울대는 관악으로 자리를 옮긴 뒤 학생들이 황량한 캠퍼스에 적응하지 못해 동숭동시절을 회상하며 보낸 `종합화시대'.

이들은 암울한 유신체제에 적극 맞서기보다는 차가운 냉소주의에 빠져 `카지노 노름'이나 고고와 블루스를 곁들인 `쌍쌍파티'로 억눌린 감정을 표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점차 관악캠퍼스에 정을 들여 도서관앞 잔디밭을 `아크로폴리스'라 명명, 지금까지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이밖에 紫霞淵,감골,감골,버들골 등의 이름들도 이때 붙였다.

75년 관악에서의 첫 개강 직후 터져나온 월남패망, 긴급조치9호 선포, 학도호국단 설치령 공포, 교수재임용제 실시 등으로 `긴조시대'를 맞았으며 학생들의 의식도 크게 바뀌어 대학생으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농촌이나 공장으로 뛰어드는 사례가 속출했고 역사변혁의 주체로 `민중'이 등장했다.

학생운동의 양상도 변해 곧잘 시위대와 전경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교문 맞은 편에는 동양최대의 파출소가 생겼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일찻집이나 고고미팅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아예 `개빙고', `종빙고' 등의 이름으로 월례행사화되다시피 한 것도 이즈음.

79년 `서울의 봄'은 대학사회를 들뜨게 해 아크로폴리스에서는 5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이는 집회가 연일 계속됐고 학생들의 주장을 담은 `대자보(大字報)'가 학교를 덮었다.

80년대 초반은 80년 발표된 졸업정원제 실시,대입본고사 폐지,과외금지 등을 골자로 한 `7.30교육개혁 조치'에 따른 이른바 `졸정시대'.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 학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로 시험때면 도서관앞에 는 꼭두새벽부터 긴 줄이 생겼고 교양영어 해석판과 수학 풀이집이 나온 것도 이때.

84년 학원자율화 조치로 구속학생 석방, 제적학생 복학 등이 이어지면서 대학문화의 `정치화'는 한층 심화됐고 학생들의 의식도 과격한 이념으로 무장돼 `민중민주주의', `반미.반전.반핵'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학생회 부활로 이전 학생운동의 `낭만'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학생들은 농촌,공장,야학 등으로 뛰어들어 `위장취업', `노동야학'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시위양상도 과격해져 기습시위, 화염병투척이 일반화됐고 미문화원,민정당사 등 공공기관에 대한 점거농성도 잇따랐으며 이에 맞서 경찰도 지랄탄,사과탄,직격탄 등을 쏘아대 한때 `無彈無石',`無石無彈'의 논쟁도 벌어졌다.

한잔집과 일미집, 미도관, 녹두집이 있던 근처 신림동 녹두거리와 봉천동은 하숙방과 자취방, 고시원촌으로 변했고 무료한 시간을 죽이려는 학생들을 위해 동시상영 영화 소극장도 속속 들어섰다.

한편 80년대말 이후 `학습'보다는 `개성'을 존중하는 신세대 학생들이 대거 등장하고 팩차기와 자가용 통학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으며 공휴일이면 관악캠퍼스가 `서울大공원'이 돼 몸살을 앓는 것도 새로운 풍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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