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어버이 날의 소외된 노인들

1996. 5. 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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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聯合))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공원.

공원 벤치 곳곳에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거나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는 허름한 노인들의 모습은 이미 낯익은 풍경이 된 지 오래다.

언젠가부터 소외된 도심 노인들의 안식처로 자리잡은 이곳에 최근 포근한 날씨와 함께 또다시 노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종일 가랑비가 뿌리던 지난 4일 낮.

매년 어김없이 돌아오는 어버이날을 나흘 앞둔 이날도 끼니를 해결하려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우산을 받쳐들고 공원관리사무소로 향하는 언덕길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한 종교단체에서 이틀전부터 관리사무소 1층 간이식당에서 점심을 나눠준다는 소식에 한동안 찾았던 파고다공원 대신 이곳으로 발걸음을 돌린 노인들.

간간이 부랑 노인들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 대부분에게는 장성한 자녀가 있다.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노인들은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감추고있다.

"사위한테 미안해서..두 노인네가 아들도 아니고 사위한테 얹혀 살기가 너무 미안해 점심이라도 우리가 찾아 먹으려고. 빨리 죽어야하는디.."

이날 오전 간이식당 1층에서 배급받은 국수를 말아 훌훌 마시고 난 安학림 할머니(75.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와 劉在佑 할아버지(79).

老부부는 생수차를 운전하는 사위 신세를 지는게 싫어 4년전부터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安할머니는 5∼6년전 털옷공장에서 실밥을 따며 용돈을 벌기도 했지만 한번 쓰러진 뒤 이제는 건강이 허락치 않는다고 말했다.

老부부는 이 곳을 찾기 시작한 뒤부터 갓난아이 때 홍역을 앓다 죽은 아들이 지금 살아있으면 하는 바램이 자꾸 든다.

劉할아버지는 이번 어버이날에도 지난해처럼 집근처 교회나 노인학교에 갈 생각이다.

"집에만 있으니 말상대도 없고 심심해서 한번 와봤는데 여기오니 재미좋네.국수도 공짜로 주고.."

노인학교에서 이들 老부부를 만나 권유를 받고 이날 처음 독립문공원에 와봤다는 李양금 할머니(83.서울 서대문구 홍제2동)는 이곳이 재미있어 앞으로도 계속 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老부부처럼 딸,사위와 함께 사는 李할머니는 어버이날이면 먼저간 할아버지 생각에 쓸쓸함이 더하긴 하지만 그냥 덤덤해진지 오래다.

공원 노인들은 대부분 서대문구 홍제동이나 홍은동,은평구 녹번동 등 인근 동네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오전 10시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해 12월 날씨가 추워지면서 점심을 나눠주던 한 종교단체의 배식이 끊기자 파고다공원과 남산,서울역 등지로 하나둘 흩어졌던 노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말.

종교단체의 배식이 재개된다는 전단이 공원 앞 독립문 파출소 담벼락에 붙은 직후부터였다.

이날 1층 간이식당에서 노인들에게 국수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던 전도사 崔銀朱씨(27.여)는 "날씨가 포근해지면 많게는 50여명의 노인들이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있었다"며 "대부분 자녀가 있는 분들이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가족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소외된 노인네들"이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이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온 崔전도사는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 이날 "험한 이세상 오랫동안 살아오며 자식들 키우느라 얼머나 고생이 많으셨어요"라며 딸노릇을 대신하기에 바빴다.

공원관리사무소측에 따르면 겨울을 제외한 기간 동안 하루평균 이곳을 찾아 하루를 보내는 소외된 노인들의 숫자는 70∼1백여명.

이들 중 일부 부랑노인들의 경우,밤이 되면 마땅한 잠자리가 없어 인근 병원 영안실에 누워 잠을 청하다 쫓겨나 지하철 입구 계단 등에서 뜬눈으로 떨다 밤을 새기 일쑤다.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인 全香奎씨(32)도 "공원 노인들의 숫자가 줄잡아 1백여명은 되는 것 같다"며 "모두 자녀들이 있을텐데 하루종일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안스럽다"고 말했다.

겨울내내 파고다 공원에서 2백원짜리 점심식사로 끼니를 해결하다 다시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는 朴贊五 할아버지(67.서울 은평구 녹번동)는 이미 장성한 두아들이 있지만 무슨 사연인지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있는 처지.

"지금보다 더 늙으면 모르겠지만 그냥 우리끼리 사는게 편치.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디 부모랑 같이 살고싶어 하나.."

朴할아버지는 강남의 한 교회로부터 받아둔 어버이날 초대권을 내보이며 이번 어버이날은 그래도 쓸쓸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쓸쓸히 웃어보였다.(愼址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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