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국토(國土)침식하는 묘지..금기(禁忌)의 벽 헐자(15)

1994. 4. 1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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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와 죽은자의 자리다툼..파리

선반식설계 묘지 파리장의 사랑받는 공원

이브몽탕,쇼팽,샤르트르도 1평 시립묘에

(파리=연합(聯合)) 廉周仁기자=개나리꽃이 한창인 지난 4월초 파리에서 가장 큰 페르라셰즈 공설묘지.

에르나르부인(70)은 봄날씨가 완연하게 느껴지자 오전 일찌감치 남편이 묻혀있는 묘소에 찾아와 검은 대리석으로 된 묘석을 정성스레 닦고 엊그제 자식들이 놓아둔 화분에 물을 뿌린다.

3년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택을 1주일에 한두번 찾아와 돌보는 것이 습관이 된지도 오래다.

60세 이상이면 묘지구내에 차를 몰고 들어올 수 있어서 반평밖에 안되는 남편의 묘소이지만 물병과 걸레를 싣고 와 꽃에 물을 주고 묘석을 깨끗이 닦고나면 생전에 남편의 서재를 청소하던 때처럼 흐뭇한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이곳은 그녀가 세상을 뜨면 묻힐 자신의 유택이기도 하다.

가족묘로 영구분양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숨지면 남편이 모셔진 바로 위에 안치돼 다시 남편과 만나게 된다.

선반식으로 관을 놓을 수 있도록 묘지가 설계되어 있어 죽은 순서대로 맨밑에서부터 차곡차곡 가족들의 관이 안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르나르부인이 남편묘소를 이처럼 정성스레 돌보는 데는 남편을 그리는 아낙네의 애틋한 감정때문이지만 자신과 두 자녀가 되돌아갈 유택이어서 더욱 손길이 따사롭다.

파리시 20개區중 맨마지막구인 제20구의 초입에 위치한 이 시립묘지는 파리 최대의 묘지이면서 동시에 세계최고(最古)의 공설묘지다.

프랑스 혁명정부가 도시의 묘지난을 해소하기 위해 나무가 우거진 야산 0.42㎢에 영국식 정원개념을 살려 조성한 이 묘지는 1804년 문을 연 이래 파리시민이 가장 많이 묻혀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집단묘지이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도로와 도로 사이에 97개의 크고 작은 분묘단지가 들어서 있고 그 단지중에는 유난히 결속의식이 강한 유태인 묘소도 볼 수 있다.

10만여개의 분양분묘에 총 50만명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무연고묘의 재사용으로 지금도 제20구에 거주하는 파리쟝의 사자(死者)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시립묘지인만큼 파리에서 살다간 유명인들의 묘소가 적지 않다.

예술의 도시답게 불후의 명작을 남긴 예술가들의 묘소에는 으례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묘지입구에서 사온 꽃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57개의 묘역중 제44묘역의 아가도街 5번지에 안치된 이브 몽땅의 유택에는 생나제르지방에서 일부러 찾아온 플립뽀부인이 친구와 함께 빨강색 장미 한송이를 헌화한다.

지난 91년 11월 69세를 일기로 숨지자 6년 먼저 세상을 떠난 배우출신의 부인 시몬 시뇨레가 안장된 이곳 가족묘에 합장되어 있다.

고엽(枯葉)이라는 노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영화배우로도 이름을 날린 이브 몽탕은 한때 프랑스 대통령감으로 지목될 만큼 사회적 명예와 부를 누렸으나 그의 묘소는 주변의 여늬것과 다를바 없이 검소하기만 하다.

가로 80cm에 세로 1.6m 크기의 묘역이 직육면체 모양의 베이지색 화강암 평석으로 덮여있고 묘석의 높이도 지면에서 30cm에 불과해 바로옆의 1.2m 높이에 비하면 오히려 초라한 느낌이다.

오래돼 이끼가 낀 옆묘역에 비해 깨끗한 느낌을 주는 것이 색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묘석위에는 6개의 소형화분에 장미, 백합, 진달래, 아마릴리스 등 붉고 노란 색색의 꽃들이 곱게 꽂혀있다.

또한 손바닥만한 사각 기념석 4개가 묘석위에 책받침대처럼 서있고 친구나 그가 관여했던 연예단체의 추모글이 한두줄 적혀 있다.

그중 하나에는 "시간은 흐르나 추억은 남는다"라는 말이 새겨져 그가 불렀던 노래 고엽처럼 사라진 불멸의 대중가수를 기리고 있다.

묘지의 중심부 드농거리에는 폴란드 출신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쇼팽을 찾아가는 기자에게 프랑스 관광객이 "지도와 번지수를 모르면 찾기 힘들다"며 친절하게 방향을 가리키고는 "여기는 묘지라기보다는 대형박물관과 같아서 걸핏 길을 잃기 십상이다"고 덧붙인다.

1849년에 숨져 묘지난이 없었던 탓인지 넓이가 1평가량으로 이브 몽탕보다는 배나 크게 묘터를 잡고 있다.

또한 꼭대기에 여인의 석상이 놓인 3m높이의 회색 조각물이 장엄하게 세워져 조각공원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쇼팽보다 1년늦게 숨진 문학가 호노레 드 발작의 묘소도 제46묘역 남쪽편에 마련돼 있고 그의 청동색 흉상이 2m높이의 묘탑위에 세워져 지나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발작의 묘소에는 부인 레뷰카와 처남 방다랭부부가 함께 안장돼 가족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파리장의 의식속에는 호사스럽고 넓은 사설 분묘란 있을 수도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작고 검소한 묘지로 묘지난이 있을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시립묘지인 페르라셰즈 묘지는 프랑스 건축가 브로니야르가 최초의 정원식 묘지로 설계한 사실로도 유명해 이후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선보인 공원식 묘지의 효시가 되었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묘지에 실핏줄처럼 뻗은 도로변에 심어진 수목아래 벤치에 인근 주민들이 앉아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면서 소일을 하고 있는 모습도 동양인의 눈에는 이채로웠다.

파리시내에는 총면적이 0.92㎢인 시립묘지가 14곳에 분산설치돼 파리쟝의 유택으로 활용될 뿐아니라 일부는 박물관으로 지정될 만큼 공원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파리시 남쪽편 제14區 몽파르나스묘지에는 검소한 회색 화강암 묘석아래 지난 80년에 숨진 철학자 샤르트르가 그의 부인 드보봐르여사와 함께 안치되어 있어 파리를 방문한 철학도들의 순례지가 됐다.

또한 세느강너머로 에펠탑이 보이는 제16구의 파시묘지에는 가로 2백m 세로 1백m가량의 그리 넓지 않은 면적에 1백여그루의 마로니에 나무가 심어져 도심생활에 지친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의 공존- 파리쟝들이 창출한 묘지문화의 진수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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